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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0)제82화 출판의 길 40년(53) 출판물 홍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해방 첫해에 1백5일간 워밍업의 시간을 보내고 1946년을 맞았다.
말하자면 본격적인 출판활동의 시동이 걸린 것이다. 이 시기의 출판계를 김창집씨는 또 이렇게 『출판대감』에 기록으로 남겼다.
『1946년도에 들어가서는 신문·잡지·도서가 그야말로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일간신문으론 중앙지와 지방지를 합하여 70종에 달했고 주간으론 60종이 ,잡지류는 무려 l백40종이나 되었다. 출판사는 자세한 통계를 잡기 어려우므로 확실치 못하나 약 1백50개에 달했다고 보며, 출판된 도서는 약 1천 종에 달했다. 이때에 발행된 도서는 굶었던 사람에게 밥을 준 것과 같이 좋거나 나쁘거나 나오는 대로 팔리는 상태였다. 이와 같이 출판계는 한때 호황을 맛보았으나 재고 용지가 소진되고, 인쇄 자재가 품귀현상을 빚고, 제작비가 올라감에 따라 난관에 부닥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외산 갱지 1연(신문지를 편 전지 크기의 종이 5백장을 말함)에 2만2천 원이 넘는 놀라운 고가로 암거래가 되어 출판사는 조판을 해놓고도 인쇄를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이 종이의 가격을 따져보면 외산 갱지 전지 한 장 값은 44원 꼴이 된다. 이 무렵에 선화지로 나온 『인생 1대의 경제학』(청구사 간)은 46판 41면에 정가는 6원이었으니 그때의 종이사정이 얼마나 출판활동을 압박했던가 쉽사리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외산지로 감히 출판할 생각은 꿈에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출판과 용지의 인연은 애당초부터 이렇게 시작되어 지난 40년간 성수기의 주기적 품귀현상과, 그리고 가격의 급등과 불안정으로 수요 공급 상에 문제점을 계속 안고 왔던 것이다. 이렇듯 지난날의 종이사정은 한국출판계 발전 장해 요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나는 분명히 말한다. 용지를 구하려고 애걸복걸한 이야기는 다음에 쓰기로 한다.
하여간 나부터 출판이 어째서 어려운 것인지 제대로 파악할 겨를도 없이 「을유」 창업에 동참했던 것과 같이 해방 후 초창기의 출판인들은 그 면모가 천차만별이듯 동기와 생각도 천차만별이었다. 나는 여기서 그때의 출판계를 상기시키기 위하여 출판사로서의 선두주자 격인 일부 출판인 명단을 소개한다. 이 역시 이 자료는 최영해씨(당시 출협부회장)가 우수 출판사란 전제 아래 을유문화사를 포함하여 임의로 뽑은 5개 사 명단이 『출판대감』에 실려 있으므로 이것을 인용했음을 밝힌다.
이에 앞서 일제하의 오래된 출판사로는 정음사(최영해) 영창서관(유장렬) 한성도서(주)(이창익) 박문서관(이응규) 삼중당(서재수) 덕흥서림(김기방) 동명사(최남선) 동광당(이정래) 행림서원(이태호) 명문당(김혁제) 기독교서회 등 외에 몇 개 선교출판사가 있고, 해방 후 초창기 소위 우수한 출판사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고려문화사(유명한) 백양당(배정국) 아문각(이석중) 건국사(김형찬) 일성당(황종수) 학생사 (김정수) 국제문협출판부(김을한) 백민문화사(김현송) 서울출판사(권혁창) 건설출판사(조벽암) 노농사(이민) 대성출판사(성인기) 문화당(김기오) 서울신문츨판국(하경덕) 동방문화사 (김희준) 공업도서(김팔현) 민중서관(이병준) 청구문화사(이춘송) 생활사(오억) 숭문사(한용선) 동심사(김준수) 창인사(이계하) 공업문화사(변경걸) 국제출판사(조화영) 과학사(장병태) 현우사(이근종) 인민평론사(임철) 해방출판사(추교철) 고려선봉사(양재건) 맹문사(윤경섭) 부인사(김상덕) 정문관(이광성) 동지사(이대의·백남홍) 문우인서관(정종근) 민교사(민장식) 신생사(유형기) 대조사 (이홍기) 신세대사(안병길) 청구서점(박상완) 중앙문화협회(이헌구) 문건사 (김경배) 탐구당(홍석우) 금룡도서(주)(김시필) 대양출판사(금익달) 중앙출판사(김진복) 문교사(박진규) 세문사(조성진) 헌문사(이수형) 동무사(윤병익) 개척사(김대운) 상문각(황현문) 신학사(왕태성) 동문사(김영석) 청년사(박종대) 민지사(안정용 )동화출판사(손홍명) 웅변구락부(강재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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