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찍어 빚 갚겠다는 트럼프…경제계 “대재앙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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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7일(현지시간) 워싱턴주 린든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린든 AP=뉴시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의 황당한 발상이 이번엔 글로벌 금융시스템을 강타했다.

엄청난 인플레 감수해야 가능
전문가들 “국제 경제 질서 위협 발언
북한·그리스처럼 경제 망가뜨릴 것”
국채, 헐값에 재매입도 비현실적

트럼프는 9일(현지시간) CNN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는 무엇보다도 돈(달러)을 찍어내기 때문에 채무불이행(디폴트)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기축통화인 달러 발권국이니만큼 여차하면 달러를 찍어내 부채를 갚겠다는 얘기다. 트럼프는 또 “금리가 올라가면 국채를 할인된 가격에 되살 수 있다. 유동성이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한다. 기업에선 항상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의 발언은 5일 CNBC 인터뷰와 같은 맥락이다. 그때도 미국의 부채를 다 갚을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 “경제가 붕괴하면 ‘협상’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미국의 국가부채는 19조 달러. 원화로 환산하면 2경2200조가 넘는 빚더미가 미국 경제의 숨통을 죄고 있다.

그러나 경제계에선 트럼프의 주장에 대해 미국 경제를 북한이나 그리스처럼 망가뜨리는 것은 물론 국제 경제 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발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국채를 헐값에 재매입하겠다는 ‘바이백(buy back)’구상의 바탕엔 부채를 다 갚지 않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는 대표적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미 국채에 대한 신뢰도를 뒤흔들게 되고, 순식간에 글로벌 금융시스템에 불신을 감염시켜 신용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보수주의 싱크탱크인 ‘아메리칸 액션 포럼’의 더글러스 홀츠 에이킨 대표는 “세계 무대에서 믿을 수 없는 상대로 여겨지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일”이라며 “누구도 북한 경제처럼 되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트럼프식 빚 떼먹기 전략이 가져올 재앙에 비하면 “2008년의 금융위기는 아무것도 아니다”(포린폴리시)는 지적도 나온다.

게다가 트럼프의 바이백 해법은 논리적 모순이 있다. 우선 바이백은 채무자가 빚을 제대로 갚을 수 없을 때 받아들여진다. 채권자 입장에선 한 푼도 건지지 못하는 것보다는 일부라도 받는 게 낫기 때문이다. 즉 미국이 디폴트에 가까운 곤경에 처해야 바이백이 논의될 수 있다. 바이백을 하면 신용이 떨어져 차입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또 바이백은 미 국채를 보유한 중국 등 외국은 물론 수백만 명의 미국인 투자자에게도 손해를 끼친다. 이들이 바이백을 받아들일 까닭이 없다. 바이백 비용도 문제다. 대규모 적자에 시달리는 미국 정부는 결국 새로운 국채 발행으로 비용을 조달해야 한다. 빚을 내 빚을 청산하는 것이 된다.

미국이 달러를 찍어낼 수 있어 부도가 나지 않는다는 얘기는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 엄청난 인플레를 감수해야 한다. 전례가 있다. 1960년대 미국은 베트남전 비용을 대기 위해 돈을 마구 발행했고, 그로 인해 70년대 10%가 넘는 인플레에 시달려야 했다.

달러를 찍겠다는 것이나 바이백이나 비현실적이긴 마찬가지다. 둘 다 다른 나라들에 경제적 부담을 전가하고 글로벌 경제를 위기에 빠뜨린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해외의존도가 큰 한국은 그 피해의 한가운데에 속해 있다.

트럼프의 언행과 공약이 어처구니없어서일까. 전통적으로 공화당 후보에게 쏠렸던 금융 심장부 월스트리트의 돈은 트럼프가 아니라 민주당 주자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게 달려가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클린턴이 3월 한 달에만 월가로부터 34만 달러 이상을 모아 월가 후원금이 420만 달러에 달했다고 보도했다. WSJ는 트럼프가 월가에서 거둔 돈의 액수를 밝히지 않았다. 다만 월가가 여태까지 내놓은 대선 후원금의 1%도 챙기지 못했다고 전했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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