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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화요일] 떠나간 사랑의 아픔까지 뇌 다운로드·삭제 시대 오나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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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는 몇 광년 떨어진 은하도 찾아내고 원자보다 작은 미립자도 규명하지만 양쪽 귀 사이에 있는 3파운드(1.4㎏)짜리 뇌의 미스터리는 아직 풀지 못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13년 4월 ‘브레인 이니셔티브(BRAIN initiative)’를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국 정부는 향후 10년간 뇌 지도 작성에 30억 달러(약 3조5000억원)를 투입할 예정이다. 뇌 지도란 1000억 개로 추정되는 뇌 신경세포(뉴런)를 3차원 지도 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매우 고난도의 작업이다. 한 사람의 뇌 속 뉴런을 이어 붙이면 18만㎞에 달한다. 지구를 네 바퀴 돌 수 있는 길이다. 지도 작성이 끝나면 치매 등 치료에도 활용할 수 있다. 뇌 과학 분야 국내 최대 규모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과학연구소에서 뇌 연구의 현재와 미래를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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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4일 서울 성북구 KIST 연구동 2층. 뇌과학연구소 신경과학연구단 실험실에 들어서자 동물 체취가 코를 자극했다. 이창준 단장은 “실험쥐 체취와 사료 등이 섞여 나는 냄새”라고 말했다. 흰색 책상 위에는 은박지로 싸인 플라스틱 실험 접시가 투명한 호스가 꽂힌 채 놓여 있었다. 은박지를 열자 생리 식염수에 잠겨 있는 실험쥐의 뇌가 보였다. 이 단장이 새끼손톱만 한 뇌를 가리키며 “산소를 공급해 주지 않으면 세포가 금방 죽는다”고 설명했다. 유전자 조작으로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실험쥐는 한 마리에 20만원 정도다.

1.4㎏ 뇌의 미스터리
과학의 다음 개척지는 인간 ‘뇌’
미국, 10년간 3조5000억원 들여
1000억 개 뉴런 입체 지도 작성

유럽연합, 1조5300억원 투입해
수퍼컴으로 ‘인공 뇌’ 모델 제작
한국은 치매 등 질병 치료에 집중

 신경과학연구단에선 박사급 연구원 20여 명이 알츠하이머병 등 치매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뇌 생체실험은 전적으로 실험쥐에 의존한다. 인간 대상 실험은 자기공명영상 촬영(MRI) 스캔 등 간접적인 방법으로만 진행한다. “우리 뇌에 신경세포만 있다고 흔히 오해하지만 그건 잘못된 겁니다. 신경세포보다 비신경세포가 훨씬 더 많아요. 신경세포와 비신경세포가 대략 3대 7의 비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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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단장이 설명을 이어 갔다. 신경세포는 미세한 전기를 흘려보내면서 기억을 저장하고 감정을 형성한다. 뇌 과학은 이런 신경세포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진행해 왔다. 이 단장은 지난해 학자들의 관심 밖이던 비신경세포가 알츠하이머병을 일으킨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별세포(별 모양을 닮은 비신경세포)가 내뿜는 억제성 신호전달물질인 ‘가바(GABA)’가 기억 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으로 비신경세포가 치매를 일으킬 수 있다는 세계 최초의 연구 결과였다. 별세포는 일반인의 뇌에서 흔히 발견되는 세포 중 하나로 영양분 공급을 맡고 있다.

 기존 알츠하이머병 연구는 기억력이 상실되는 원인을 신경세포 사멸로 보고 이에 집중해 왔다. 하지만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현상을 신경세포 사멸로만 설명할 수 없어 연구 진행이 더뎠다. 신경세포는 한번 사멸하면 재생이 불가능해서다. 이 단장은 “비신경세포의 역할도 신경세포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이 학계에서 받아들여지면서 뇌 연구 분야도 그만큼 넓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뇌 지도를 그리고 있는 기능커넥토믹스연구단으로 장소를 옮겼다. 실험실 분위기가 이전 연구단과는 달랐다. 실험용 핀셋보단 전자 부품이 더 많았다. 연구동 4층에 따로 마련된 실험실엔 컴퓨터 프로그래머 2명이 앉아 3차원 뇌 지도 작성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었다. 우리의 뇌는 수 십㎛(1㎛는 1000분의 1㎜) 크기의 신경세포 1000억 개가 복잡한 거미줄처럼 연결된 형태다. 서로 다른 신경세포가 연결되는 지점을 시냅스(synapse)라 부르는데, 인간의 뇌에는 1000조 개의 시냅스가 존재하는 것으로 과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런 연결 고리를 확인해 이어 붙이면 하나의 뇌 지도가 탄생한다. 과학자들은 뇌 지도를 ‘커넥톰(connectome)’이라 부른다. 연결된 두꺼운 책이란 뜻이다. 염색체가 같은 쌍둥이라도 뇌 지도는 완전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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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연인과 관련된 기억을 지우는 내용의 영화 ‘이터널 선샤인’.

 연구단은 지난해 실험쥐의 뇌 중 기억을 관장하는 해마 부분의 지도 일부를 완성해 기억력을 결정짓는 세포 간 연결성을 확인했다. 김진현 기능커넥토믹스연구단장은 “해마 신경세포 중 흥분을 담당하는 20여 개의 신경세포에 대한 뇌 지도를 그렸다”며 “세계적으로 포유류에 대한 뇌 지도를 완성한 곳은 없다”고 말했다. 뇌 지도 작성은 특수 염색액을 사용해 신경세포에 색을 입힌 뒤 뇌를 절단해 신경세포를 하나하나 확인하는 고된 작업이다.

 현재 뇌 지도가 완성된 생명체는 길이가 1㎝에 불과한 예쁜꼬마선충뿐이다. 김 단장은 “신경세포 302개가 얽혀 있는 예쁜꼬마선충의 뇌 지도를 그리는 데 15년이 걸렸다”며 “현재는 기술이 발전해 그보다 빠르지만 한 생명체의 뇌 지도를 완성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고 했다.

 뇌 지도가 완성되면 어떤 일이 가능해질까. 우선 기억과 감정의 비밀을 풀 수 있다. 과학자들은 기억력의 비밀을 아직 풀지 못했다. 이름과 집 주소를 기억하는 데 뇌 속 해마 부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인 장소와 방법은 미지의 영역이다. 사랑했던 연인과의 추억을 머릿속에서 지우는 스토리를 담은 영화 ‘이터널 선샤인’도 뇌 지도가 완성될 경우 현실이 될 수 있다. 기억이나 특별한 경험을 뇌로 주입하는 것도 가능하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트리니티처럼 헬리콥터 조종법을 뇌에 삽입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뇌가 ‘과학의 다음 개척지’로 불리는 건 연관 산업이 넓어서다. 로봇·의약품 등 다방면에 활용할 수 있다. 미국은 ‘브레인 이니셔티브’를 가동 중이고 유럽연합(EU)은 12억 유로(약 1조5300억원)를 투입해 수퍼컴퓨터로 ‘인공 뇌’ 모델을 만들고 있다. 한국은 2차 뇌 연구 촉진 기본계획(2013~2017년)을 확정해 실행하고 있지만 예산 규모는 미국·유럽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170억원을 투입해 뇌 전체가 아닌 치매 등 특정 질환 발생 부위의 뇌 지도를 만드는 데 1차 목표를 두고 있다.

강기헌 기자 emckk@joongang.co.kr

커넥톰(connectome)=뇌 신경세포(뉴런)의 연결망을 뜻하는 신조어다. 외부 자극이나 기억을 저장할 때 신경세포가 이웃 신경세포와 어떤 방식으로 신호를 전달하는지를 그려놓은 뇌 지도를 말한다. 항공사에서 사용하는 취항 지도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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