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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연다 <14>|주체적 정신 다지는 교육이 절실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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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21세기는 어떠한 성격의 시대일까. 현대가 아무리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고는해도 불과 15년앞일인데 전혀 짐작조차도 못할바는 아닐게다.
지구상에 인구가 더 많아지고 자원은 더욱 고갈되고 과학과 기술문명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발전할 것이라는 정도의 상식적인 예상쯤은 누구라도 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있는 한국의 입장에 서서 볼때에 그러한 21세기의 변화가 구체적으로 의미하는바는 무엇일까.
가장 분명하게 예측할수 있는것은 국가들 사이에 무자비한 생존경쟁이 전개되리라는 점이다. 그 경쟁의 양태와 방법·전략등이 얼마나 다양하고 정교해 질 것인지에 대해서 까지는 자세히 말할수 없어도 최소한 국가간 경쟁의 정도가 심화되고 무자비해 질것이며, 우리도 그 속에 끼여들게 될수밖에 없으리라는 짐작을 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한 조짐이 벌써부터 우리 눈앞에서 벌어져 왔기 때문이다. 이디오피아의 기근·중동전·월남난민 같은 우리시대의 비극이 전개되고 있는 다른 한편에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 비극을 이용하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하는것이 우리시대의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입장에서는 두려울것이 없지않은가.
국가 간의 경쟁이건 개인간의 경쟁이건 겁날 것이 무어란 말인가. 경쟁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이야말로 이미 도가 튼지 오랜 백성들이 아닌가. 경쟁이라는말만 들어도 피가 솟구칠 만큼 우리는 경쟁에 숙달되어 왔는데 21세기가 바로 경쟁의 시대, 그것도 무자비한 국제경쟁이 벌어지는 시대라고 한다면 그동안 우리가 제도적 교육을 통해서 연마해 온 목적제일 주의의 경쟁능력이 진가를 발휘할수 있지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지난 40년 동안 우리교육의 특징이 되어 오다시피 한 무자비한 경쟁의 원리에 의해서 길러진 저력과 가치관이 과연 21세기라고하는 국제경쟁시대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까. 아무리 따져보아도 그럴것같지는 않다.
지난날의 우리교육을 통해 길러온 무분별한 경쟁능력은 1970년대까지의 후진국들과의 경쟁에서는 유리한 작용을 했을는지 모르지만 21세기에서는 어림도 없는 얘기다.
중동에서의 건설작업이나 서독에서의 탄광노동에서 문맹자가 대부분인 후진국의 노동력과 경쟁했을 때에는 우리의 인력수준으로도 넉넉했겠지만 앞으로 우리가 만나게 될 경쟁의 마당과 상대는 전혀 차원이 다를것이 틀림없겠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교육이 그동안 길러온 경쟁력이라는 것이 21세기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결정적으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많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럴수밖에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교육의 생리인 경쟁의 특징 그 자체 속에서 발견된다. 우리교육이 길러온 경쟁의 특징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무자비하게 인간을 단순화하는 방향으로만 치달리는 경쟁이었다고 할수 있다.
창조성·자율성·협동성 같은 능력이 자랄수 있는 토대인 인간성을 되도록 억압한 채 기계처럼 단순하게 반응하는 획일적 기능을 기르는 경쟁에 몰두하는것을 우리는 바라는 교육이라고 믿어왔던 것이다.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협동할줄 아는 능력을 바탕으로하여 다양하게 개발되고 신장되는 국민들의 창조적 적응력이 바로 국제경쟁에서 살아 남을수있고 남을 앞지를 수있는 조건이 될 그런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지난날 우리의 교육이 경쟁적으로 길러온 인간형은 아마도 가장 역기능적인 불리한 조건이 될것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것 같다.
창조적 적응력이란 자기 자신의 개성과 자율적 사고력이 먼저 있고서야 자랄 수도 발휘될수도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우리가 교육을 통해 경쟁하고 노력해온 것은 바로 그러한 자율적 사고력과 개성을 극소화시키는 일이었다. 그대신 우리교육에서는 획일주의와 목적제일주의, 그리고 문화적 사대주의를 경쟁의 기준으로 삼아 열심히 길러왔다고 말할수 있다.
지난 40년간의 우리나라교육을 지배해온 교육내용·방법·제도. 행정속에서의 일관된 정신적 흐름은 바로 획일주의였다. 민주주의 교육이나 개성존중의 전인교육이라는 구비온밑에서조차 교육실천은 획일주의적이였다. 그러한 교육실천속에 숨겨져 있는이념, 획일주의는 대를 물리면서 우리사회와 우리문화를 지배해왔다.
요즘젊은 대학생들이 민주를 주장하고 자유를 논하지만 그러한 주장과 논의에서조차도 그 전개방법과 내용이 놀라울 이만큼 획일성을 나타내는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40년간 계속되어 온 교육에서의 획일주의로 인해 제도적 교육의 영향권과 가까운 세대일수록 창조적 개성이 사라지고 사고가 단순해졌으며 가치판단이 혹백론적으로 정착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단과 방법의 윤리성을 간과하고 과정에 투입되는 노력의 의미를 도외시한 채 결과만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아온 교육에서의 목적제일주의는 이른바 기능주의니 행동주의니하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왔다.
교육현장에서는 정답 맞히기, 점수 따기등의 수법에 의해 목적이 수단을 신성시하는 가치관이 자라왔다.

<획일·예속으로 일관|창조적 개성 사라져>
이렇게 교육을 통해 길러진 목적 제일주의의 가치관은 그교육을 받고 자란 기성세대가 운영하는 사회생활에서 실천으로 옮겨져 왔다.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목적은 신성한 것이니까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비민주적인 방법도 용납될 수 있다거나, 매상고를 올리는 목적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목적 달성을위한 수단으로 허위선전이나 과대선전은 불가피하다거나 하는 식의 양해사항과 유보사항들이 당연시 되어왔다.
학교교육의 내용을 편성하는 기본원리가 남의 나라 문화를 기초로하여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지난 40년간 우리의 교육에서는 전통적으로 자기나라의 문학을 경시해 왔다. 모국어 교육이 소홀히 되였고 제나라의 음악과 춤과 예술을 가리키는것을 부끄럽게 알아왔다.
그랬으면서도 남의것을 높이 섬길줄만 알았지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다. 남의것을 받아들일 제것의 토대가 약했으니 남의 것을 받아들인들 뿌리내릴곳이 없었을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행장도 갖추지 못한체 비행기를 불러들인 격이고, 밭을 일구지도 않은채 씨를 뿌린 격이다.
우리교육에서는 정치적 사대주의보다 더 나쁜 문화적 예속주의가 일관된 교육이념 노릇을 해 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닐상 싶다.
정치는 힘과 힘의 관계이니까 필요에 따라서는 사대도 방편일수가 있다. 그러나 문화가 예속될 때에는 의식과 가치관이 주체성을 잃게 되고 결국 사고방법까지 변질되어 자주적으로 생각할 줄 모르게 되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고 나쁜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지난 40년간 외국것을 모방해서 만든 교과서를 가르쳐 왔고 외국의 교육이론을 근거로 삼아 교육 실천방법을 연구해왔다. 그결과 우리교육은 외국것을 닮지도 못했고 우리나름의것을 창조해 내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교육이 실패해 오는 과정 속에서 예기치 못했던 부산물이 생겨났으니 바로 학문적 예속과 문화적 사대주의 현상이다.
제나라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니 제나라 문화식으로 사고력을 기를수없고 따라서 사물을 관찰·분석·이해하는 자기 나름의 감각·통찰력·사고방법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학교 교육이 그렇게 길러온 결과다.
요즘 우리사회에서는 기성세대나 젊은 세대나 할 것 없이 마치 아이들이 싸우다가 어른에게 일려 바치는 것처럼, 옛날 조선조 때에 명나라나 청나라에 고자질하던 것처럼 걸핏하면 남의 나라를 등에 업고 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 유행인 것처럼 보인다.
반정부 활동에서도 외국을 들먹이고 친정부 활동에서도 이에 질세라 외국을 들먹인다.

<외국논리만 흉내 내|우리의 철학이 없다>
학생들조차 시위를 하고 성명서를 내고 할때에는 사전에 외국 언론기관에부터 알린다. 주체성·민족성을 강조하는 이론까지도 외국학자들의 이론을 빌어서 흉내낸다.
자연과학이나 기술개발의 분야가 아닌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까지 학문적으로 예속된다면 이제 15년 앞으로 다가온 21세기에 우리는 누구의 철학과 이념을 기준 삼아서 남들과 경쟁하며 살아갈수 있을것인지가 문제다. 앞으로 15년 동안 우리는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이 빠른 변화의 우리 나름의 철학과 정신을 지니는 일일 것이다.
새로운 새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 모든 민족들은 어쩌면 제각기 나름대로의 호랑이 꼬리를 붙잡은채 뛰고있는 것과도 비슷한 처지에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이 그 꼬리를 붙잡고 있는 호랑이는 그 중에서도 제일 크고 빠른 놈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또다른 수많은 호랑이들에 의해서 뒤를 쫓기고 있는 숨가쁜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두가지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스스로 가장 크고 빠른 호랑이가 되거나 아니면 잡고있는 호랑이 꼬리를 휘둘러 뒤로 내동댕이쳐 버리거나이다.
어느편을 선택하기 위해서도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제정신을 지니는 일일 것이다. 숨이 가쁘고 힘이 달릴수록 더욱 필요한것이 제정신을 지니는 일이다. 그래야만 나의 눈으로 주위의 변화를 살필수 있고 나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바로 이점에 있어서 지나치게 안이했던 것이다. 국민들의 교육열 덕분에 악조건 속에서 그나마 지탱해 올수 있었던 제도적 교육의 겉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마치 횰륭한 교육정책과 우수한 행정의 결과인것처럼 믿으려 해 왔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우리교육의 현장을 지배하고있는 진정한 교육의 이념이 무엇인지를 솔직한 눈으로 살펴보려 하지않았다. 그대신 교육법이나 국민교육헌장 속에다 아름다운 문구를 동원하여 반공이니, 애국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교육이념을 제시해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념들 밑에서 교육해온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사회에 팽배해 있는 흑백론적 획일주의, 기능론적, 폭력제일주의, 문화적 자주성의 상실등의 원인을 교육이외에 어디에서 먼저 찾을수 있단 말인가.

<낡은 제도등 재검토|인적 자원 전문화를>
60년대말 까지는 우리의 국민교육에서 반공교육처럼 성공한것이 없었던것 갈았지만 70년대 이후부터는 반공이념의 교육적 성과가 점차 의심스러워지고 있는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난날 반공이념의 실천방법이나 교육내용이 그리도 단순하고 졸렬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공교육의 목적이 달성되었던 것은 학교교육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6·25를 체험한 세대들의 반공의식은 사실상 반공교육의 필요조차 없을정도이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해야 옳을것이다.
이런 현상을 마치 반공교육을 잘한 것으로 착각해온 안이한 관료주의적 자세 때문에 그동안 우리는 전후에 태어난 세대들에게 가르쳐 줄 반공이념의 학문적·이론적 토대를 다지고 교육내용과 방법을 마련하는일에 관심을덜 가져왔던것이 21세기를 앞에 놓고 볼 때에 우리에게 있는 남보다 유리한 조건이란 국민들의 교육열이 높고 교육받은 인구가 많다는 사실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교육적인 힘은 자주적인 정신위에서 자라는 다양하고 창조적인 적응력으로 발휘될 때에만 21세기에서 유리한 잠재력이 될수가 있는것이다. 그렇지 못할때에는 오히려 불리한 역기능이 될위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교육은 절박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선택의 방향은 명백하다. 지난 40년간의 교육이 지녀왔던 낡은 특징들을 이론적·실천적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새롭게 바꾸는 것이다.
사고와 행동에서의 다양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교육, 개인의 자유와 인격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교육, 민족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게하고 그것들을 기초로 창조력을 기르는 교육,능력과 노력에 따르는 개인간의 경쟁과 보상에서 공정성과 윤리성이 엄격하게 지켜지는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이론적 연구와 실천적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두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한다. 첫째는 교육문제를 생각하고 연구하는 사고와 정신의 자주성이 확보되는일이고 둘째는 국가교육을 운영하는 인적자원이 전문화되는 일이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분야에서일수록 먼저 그 분야를 다루는 관료의 질이 높아지고 전문화되는것은 당연하고 상식적인 원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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