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바람에 실려 흩어지는 첫눈처럼…사랑인지 모르고 흘려 보낸 첫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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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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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의 여인
이순원 지음, 문예중앙
284쪽, 1만3000원

뒤늦게 사랑을 깨달아 나름의 회한을 지니게 된 세상의 모든 남성들이 읽어야 할 소설이다. 작가 이순원(58)씨는 ‘이 방면’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다. 1997년 현대문학상을 안긴 출세작 중편 ‘은비령(隱秘嶺)’ 덕분이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옛 친구의 아내에게 꽂혀 빨려드는 중년의 곤혹을 지상의 세상이 아닌 것 같은 대관령의 세찬 눈보라, 영원과 아득한 인연을 상징하는 별의 이미지 등으로 버무려 독자들을 뒤흔들었다. 은비령은 지도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소설 속 가상 지명이었지만 훗날 실제 지명이 됐다. 그만큼 소설의 힘은 셌다.

은비령에서 사랑의 장애물이 죽은 친구에 대한 죄책감이었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남녀의 나이 차이, 한국인 내면에 면면이 전해져 내려오는 최소한의 인간 법도가 사랑의 걸림돌이다. 주인공은 40대 중반의 신문기자 박주호. 그는 군대 제대 후 대관령 이모부가 운영하는 구판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2년 가까이 복학 등록금을 번 적이 있다. 이때 만난 사랑의 상대방이 7살 어린 유연희. 연희가 바로 삿포로 여인이다. 외할머니의 아버지가 미국인이어서 이국적인 외모를 타고난 연희는 불행한 소녀였다. 아버지 유강표가 70년대 초반 스키 국가대표로 뽑힐 정도로 잘 나갔지만 중졸 학력이어서 끝내 자리잡을 수 없었고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절반 일본인인 연희의 어머니는 고향 삿포로로 돌아가고, 한국에 남은 연희가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절, 대학생 주호와 풋사랑을 나눈다. 주호는 물론 그게 꿈에도 사랑이리라는 생각조차 못했지만.

사랑의 길 위에 서 있는 남녀의 감정 교환을 달달하게 몰고 가는 작가 이씨의 솜씨는 이번 소설에서도 여전하다. 대학생 오빠 주호는 어느 날 애틋한 연희에게 공책을 선물한다. ‘마음산책’이라는 제목을 붙여 인생 명언록 책과 함께. 하루에 한 구절씩 쓰며 마음을 다잡으라고 충고한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같은 인생 격언이 유행하던 시절로의 회귀, 복고 코드다. 실은 첫 사랑의 뒤늦은 복기 자체가 복고 전략이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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