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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맞는 아내’의 정당방위는 언제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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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장혁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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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장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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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25일 문모(당시 58세)씨는 전처 조모(45)씨의 목에 흉기를 들이대며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이혼한 남편을 다시 받아들인 지 열흘 만의 일이었다. 결혼 후 20년간 폭행과 욕설을 일삼던 문씨는 이날도 온갖 욕설을 해대며 폭행하다 칼까지 집어들었다. 문씨를 밀쳐낸 조씨는 부엌 찬장에서 마늘 찧는 몽둥이를 꺼냈다. 자녀들에게 “고아원에 갈 준비하라”며 폭언을 하던 문씨가 쏟아진 술을 밟고 미끄러져 넘어지자 조씨는 몽둥이로 문씨의 머리를 수차례 내려치고 넥타이로 목을 졸랐다. 조씨는 경찰에 자수해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 일이 미국에서 벌어진 것이었다면 조씨는 어떻게 됐을까.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1970년대 말 러노르 워커 박사가 제시한 ‘매맞는 여성 증후군(BWS·Battered Woman Syndrome)’ 이론에 따라 미국 법원은 80년대 중반부터 정당방위 인정 범위를 확대해 왔다. BWS 이론에 따르면 상대방의 폭력이 중단된 순간에 살해하는 것이 폭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는 판단은 ‘학습된 무기력’ 상태에 놓인 상습적 구타 피해자 입장에서 ‘합리적 선택’일 수 있다.

조씨는 지난 22일 서울고법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1심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 9명 전원이 유죄를 선택했고 재판부는 “사회통념상 정당한 방어로 볼 수 없다”며 정당방위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쓰러져 폭행을 중단한 문씨의 목을 졸랐고, 살인은 가정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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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2심 재판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정당방위는 안 되지만 BWS로 인한 의사결정 능력 저하는 인정된다고 봤다. 전문 심리위원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심각한 가정폭력으로 인해 폭력적 자극에 과민한 상태였고, BWS로 인해 합리적 의사결정을 하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징역 2년형은 그대로 뒀다. “소중한 가치인 생명을 잃게 해 죄가 무겁다”고 설명했다.

90년대부터 여성계와 학계에서는 가정폭력 피해자의 남편 살해사건에서 정당방위 또는 긴급피난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꾸준히 해왔다. 가정폭력 피해자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봐야 한다는 목소리다. 2005년 한국에서도 BWS를 감형 요인으로 고려한 판결이 처음으로 나왔다. 하지만 조씨 사건에서 보듯 BWS를 법리적으로 수용하지는 않고 있다. 대신 참작 사유를 근거로 형량을 낮추는 선에서 ‘타협’하고 있다. 유죄를 선택한 배심원 9인의 법 감정도 엄연한 현실이지만 가정폭력 피해자의 심리 상태에 대한 인식도 넓혀갈 필요가 있다. 법원의 심각한 고민을 기대한다.

임장혁 기자·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