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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변하지 않고도 살아남은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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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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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뉴디지털실장

뉴욕에 가면 꼭 들르는 곳이 있다. 1927년 문을 연 헌책방 ‘스트랜드’다. 특별히 살 책이 있는 것도 아닌데 뭔지 모를 매력에 항상 찾게 된다. ‘18마일의 서가’라는 별칭 그대로 지하층부터 3층까지의 서가 길이가 18마일(29㎞)이 넘는데, 그 사이를 걷다 보면 뜻밖의 발견을 하는 재미가 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만나게 된다”면서 스트랜드를 미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꼽았다고 하지 않나.

사실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만나는 재미는 책방을 만나는 순간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 싶다. 최근 뉴욕 출장 중 브루클린에 밥 먹으러 갔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헌책방 ‘P.S.북숍’이 딱 그랬다. 골목을 걷다가 서점 유리창 안으로 턱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가 피아노 치는 모습에 이끌려 책방에 들어갔다. 흔한 헌책방인 줄 알았는데 희귀한 초판본에 각종 고서까지 여러 권 있었다. ‘특별 주의’ 푯말이 붙은 고서 코너에서 하드커버가 너덜너덜해진 손바닥 크기의 『이솝우화』를 만지작거리니 피아노 치던 남자가 다가와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고 슬쩍 한마디 하고 지나간다. 그 말에 18세기에 발간한 『이솝우화』를 덥석 사버렸다. 읽을 것도 아니고 고서 모으는 취미도 없는데 말이다.

한 번은 다운타운에서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예쁜 책방이 있길래 들어가 봤다. 마침 인테리어 사진집을 낸 저자와의 만남 행사가 한창이었다. 누구라도 들어가 샴페인 한 잔에 브라우니를 먹으며 저자와 대화할 수 있어 더욱 매력적이었다. 알고 보니 1964년 문을 연 이래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손꼽히며 로버트 드니로와 메릴 스트리프 주연의 영화 ‘폴링 인 러브’(1984)에도 등장한 ‘리졸리’였다. 치솟는 임대료 탓에 원래 있던 5번가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1년여 만인 지난해 말 1896년 지어진 이곳 세인트 제임스 빌딩에 다시 문을 열었다. 지난해 비슷한 위기를 겪은 P.S.북숍도 브루클린 인근 주민들이 참여한 크라우드 펀딩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국 최대 서점 체인 반즈앤드노블조차 아마존의 공세를 못 이기고 속속 폐점하는 사이 뉴욕의 오래된 책방들은 망하기는커녕 이렇게 존재감이 더욱 커져 있었다. 책만 쌓아두어선 아무도 찾지 않는 세상에 책을 만나는 매력적인 경험을 문화상품으로 팔면서 말이다. 뉴욕 도심 곳곳에서 마주친 책방들을 보면서 때론 변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변화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혜리 뉴디지털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