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재야요"|"동남방이 길하다"고해 대구로 떠난 김지하시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시인 김지하는 대구에 있었다. 몸도 좋지 않고 마음도 좋지 않아 원주집을 나섰는데 『동남방이 길하다』하여 대구쪽으로 왔단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좋은 사람 만나면 이야기하며 밤새워 술도 마시고 마음이 흔들리면 난도 쳐보고 그러지요.
-벌써 5년이 되었군요. 80년12월 김시인이 6년간의 영어의 몸에서 풀려나 눈 쌓인 길을 홀연히 달려와 집앞에서 아들 원보군을 처음 안았을 때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70년대 김시인은 유신체제와 맞서 싸웠습니다. 지금도 김선생은 시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고뇌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 생각합니까.

<지키기 위한 저항>
▲싸운게 아니라 지키기 위해 저항한 것이지요. 사람의 삶이나 인성의 근본은 싸움은 아닙니다. 사람은 자유스럽게 또 자연스럽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삶을 방해하고 억누르려고 하니까 부딪치는 것입니다. 세상사는 것을 싸움으로 정해놓고 싸움닭처럼 다니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싸움이 불가피할 때는 싸우게 되겠지요.
여기에서 한마디 할 수 있다면 80년대에는 부딪쳐야할 대상이 복잡해져서 그 복잡한 대상을 정확히 알기 위해 지식인들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김시인이 심혈을 기울여 쓰는 『대설 남』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읍니다. 독자들은 해학과 풍자가 가득찬 표현에서 크게 웃고, 판소리가락에 함께 장단을 맞추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내용의 어떤 부분에 가서는 이해하기 어렵다고도 합니다.
▲『대세 남』은 한마디로 말해 한반도역사의 의미를 전세계사적 맥락안에서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민중사에 바탕을 두고 말입니다. 너무 거창합니까∼ (웃음) 제3권에 보면 세계최대의 제국이었던 몽고제국과 주변 소수민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명나라·청나라도 살핍니다.
앞으로 일본·동남아시아·인도·중동·아랍·터키·러시아·구라파·아프리카·아메리카의 여러나라들이 다루어질 것입니다. 이 역사에서 민을 업고 나라를 만든 계급들이 민을 버리게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제5권에 가면 이러한 경과를 거쳐 한반도에 들어와 수운 최제우시대의 역사속에서 우리나라 민중사를 압축합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되어 해월·증산·김일부 등의 민중사상이 말해집니다 (『대설 남』은 20권정도로 계획되고 있다) .
-『대설 남』 은 독특한 문학형식이 아닙니까.
▲「단테」의 『신곡』 같은 이야기형식에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판 판소리라고도 말해지는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판소리는 드라머 구조처럼 짜여진 마디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 세계문학은 서양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3세계쪽에서 그 한계를 넘어서는 큰 문학양식이 나와야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생각됩니다.
『대설 남』 은 세계사속에서 제국들의 지배와 억압과 집곡에 대항한 사람들의 소망스런 삶을 위한 노력을 담는 것이지요.
-김시인은 강연·대담등을 통해 민중문학에 대해 말했습니다. 민중문학의 당위성에 대해 일부에서는 논란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민중문학은 무엇인가 또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 것인가, 아직 분명치가 않는것 같습니다.

<대설은 신곡 같은것>
▲민중문학은 민중의 삶이 주체가 되는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그런데 나는 민중을 요즘 유행하는 개념으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민중은 기층 노동자·농민 속에서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보입니다만, 민중개념은 삶을 중심으로 하여 그 폭을 얼마든지 넓힐 수 있습니다. 중생개념이라고 할까요. 우리가 외국이론에 사로 잡혀서 민중이라면 이런 것이라고 미리 정해버리면 안됩니다.
-80년대 젊은 작가들이 벌이고 있는 문학활동을 어떻게 보십니까. 또 일부에서는 김시인의 문학에 대한 비판적 지적도 나오고 있읍니다.
▲80년대 문학의 성과는 민족의식의 확장·고양·심화를 이루었고, 전승민예가 구체적인 민중문학 창작작업 안에 들어왔다는 점등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점은 지적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문화국수주의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적인 작업을 통해 지나친 정치주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나를 비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젊은 사람들에게 길로써 밟히지 않는다면 내가 문학을 무엇때문에 합니까? 제대로 보고 잘 밟고 넘어가 주었으면 고맙겠읍니다. (웃음)
젊은 사람들은 나에게 전투성이 부족하다. 관념론에 빠졌다 (특히 『대설 남』에서 그렇다고 합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불친절하다는 등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설 남』에 관념적인 부분이 있었던 것도 인정합니다.
다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작아지는 것보다는 생각이 커지는 것이 낫다는 말은 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의 말에 대해서는 작가의 작업은 고독하다. 그 고독한 작업에 몰두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운동속에 뛰어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고 말하겠읍니다.
-요즘 박노해씨의 시집 『노동의 새벽』이 큰 화제가 되고 있읍니다.
민중 자신에게서 나오는 문학의 가능성과 그것이 문학 전반과 어떻게 융화·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박노해씨의 작품을 경의를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격렬함보다는 신선함이 느껴집니다.
그 삶의 신선함을 건강하게 생각합니다. 그러하나 그것이 문학작품인 한은 문인으로서 할말이 있습니다. 기성작가들이 박씨의 시를 보는 앵글을 결정짓지 못하고 있는것 같아요. 꼭 이런 삶만이 삶의 실상이라고 한정하지 맙시다. 민중의 폭을 넓혀보는 민중문학의 대승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누구에게든지 자기의 별이 있읍니다. 그별을 초롱초롱하게 밝히는 삶이냐, 아니냐가 문제입니다.
-요즘 노동문제가 큰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노동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업과 근로자는 대립적인 관계가 되어서는 안되며 이것을 대립적인 관계로 만들면 민족생존의 중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기통합을 통해 민족 내부의 모순을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정부나 기업은 노동자의 기본적인 요구를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기업쪽으로 보면 소빈대실하게 됩니다.

<한, 속되게 풀어서야>
-요즘 정치문제엔 관심이 없으십니까.
▲정치하는 분들이 잘 알겠지요. 민초가 무얼 말하겠소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중요한 것은 민족 생존입니다. 그것을 인식하지 않거나 거역하면 안됩니다. 거역하면 정부든, 민간이든 심판받습니다.
-김시인도 한 사람의 재야인사라 할 수 있을지요.
▲내가 무슨 재야요. 재야라니 두 김씨가 생각나네.
-화급한 문제에 대해 김시인은 근본적인 것을 말하시는것 같군요.
▲한 사회가 격동속에 들어갈 때는 그 격동을 현실적으로 해결하는 구체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력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역사전체를 되돌아 보는 태도의 중요성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정되지 않으면 천박한 경륜에 떨어지는 결과가 됩니다.
프랑스혁명 전야의「루소」를 생각하고 싶군요. 「루소」가 말한 『자연으로 돌아가자』 는 단순한 복고가 아니고 화해롭고 공생하는 공동체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요즘 사회풍조가 너무 들뜨고 흥청거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한이 많습니다. 그것을 정신적으로 풀지 못하고 잘 입고 잘먹고 잘쓰고, 속된말로 폼잡는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상류층도 중산층도 소시민도 모두 함께…. 「간디」주의자는 아니지만 생활태도들을 바꾸어야 합니다. 외채문제도 있고, 배수진을 치고 전화위복시켜야 합니다. 학생·지식인들이 삶의 새로운 규범을 제시하는 운동이 있어야 합니다.
-최근 소설가 이문구씨와 함께 사상기행을 다녀오신 걸로 압니다.
▲16세기 이후 우리사상사에 있어 민중·민족주의적인 사색의 탐색을 위해 생전체를 던진 사람이 많습니다.
그 전통 씨앗을 찾아보는 것이지요. 그들이 활동했던 현장, 그 사상과 관련된 중요한 장소를 발로 다녀 보았읍니다. 계룡산에 다녀왔고 남원 은적암 (동학), 금산사구리골 (증산교), 연산(김일부)등지도 다녀 보았읍니다. 민중의 역사는 정말 인멸의 역사더군요. 사학자들의 고충이 많겠읍디다.
-증산교쪽에 관심이 깊은 것으로 보이는데요.
▲민중종교에 대한 관심의 하나지요. 신앙과는 관계가 없읍니다.
16세기이후 우리사상사의 큰 맥을 찾아보는 일의 일환으로 그의 저서와 행적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지요.
-저술활동이 많고 『밥』등은 베스트셀러가 됐군요.
▲쓸것을 쓴 것이고…. 베스트셀러 작가라 하는데 나 말고 딴 사람이 이렇게 말했어요. 『왜 베스트셀러 작가냐. 베스트 셀링 작가지』 허허허.
-인세가 좀 들어옵니까.
▲먹고 살만 하지요.
-김시인의 작품은 신랄·통렬한 풍자가 있으면서 홍소를 자아내는 유머가 있습니다. 유머감각은 어떻습니까.
▲어렸을 때 주변에 할머니·이모·고모들이 다 우스운 소리 잘했읍니다.

<글은 외로와서 써>
-왜 글을 쓰십니까.
▲직업으로 할 생각 없었어요. 중·고교때 생활이 불편하고 외로왔읍니다. 외로와서 글 쓰고 그림 그렸지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문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요.
「진짜 글을 쓰려면 한라산에서 방귀 뀌면 백두산 꼭대기에 앉은 사람이 아이구 구려! 하고 서해바다에서 조기가 뛰어 동해바다에 풍덩 떨어지는 그 정도로 쓰라」고 말입니다(웃음). 문학하는 행위 자체가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살기 위한 실천행위지요. 삶 자체입니다. 어떤 것을 투영·묘사하지 않는 창조적 삶의 행위지요.
(오랜 대담이 끝나고 김시인은 소주를 나누면서 한바탕 우스갯 소리를 했다. 그러고는 불쑥 손을 내밀고 『나귀타고 꺼떡꺼떡 한양 올라 가시오』하고 악수를 청했다.) <대담=임재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