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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편지, 전자공학 ‘제갈량’ 불러들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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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호 6 면

1968년 7월 박정희 대통령이 김완희 박사에게 보낸 편지(왼쪽)와 70년 1월 김 박사가 박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오른쪽). [사진 국가기록원]

‘각하께서 저보고 나와서 같이 일을 하자는 말씀 고맙게 생각되오며, 저 역시 수년 전에 각하를 처음 뵙고부터 각하를 직접 모시고 보좌의 역을 맡아보고 싶은 생각을 그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어떠한 분야에 제가 가장 공헌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가족까지 동반하고 고국을 다시 찾아주신 것을 충심으로 환영합니다. 체류 기간이 유쾌하고 재미있는 기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6개월간 국내의 각 산업체·학교 등 여러 연구소들을 방문 시찰하고 여러 가지로 현황을 살폈습니다. 이제는 여기서의 생활에도 자신이 생겨갑니다. 미국의 대학 직위도 완전히 사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저도 영구적인 정착된 생활을 구축하고자 하나하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인사 겸하여 보고 올립니다.’


‘편지 감사히 받았습니다. 가족들과 떨어져서 생활을 하게 되니 모국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외국에 가서 생활하는 듯한 불편이 많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지금 김 박사가 추진하고 있는 일들이 여러 기관과 관련이 있는 일이 많아서 여의치 않는 것이 많을 것으로 사료되어, 오원철 비서관에게 지시하여 정기적으로 청와대에 와서 오 비서관과 상의하고 김 박사께서 잘 추진이 안 되는 문제는 오 비서관의 협조와 조력을 얻어 추진하게끔 지시하였으니 오 비서관의 협조를 얻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건승을 기원합니다.’


중앙SUNDAY가 과학의 날(4월 21일)에 맞춰 1960~70년대 박정희(1917~79) 전 대통령과 당시 재미(在美) 과학자 김완희(1926~2011) 박사 사이에 오고 간 편지 56건을 발굴했다. 한국 전자산업계의 대부인 김 박사는 당시 미국 명문 컬럼비아대 전자공학과의 종신교수로 있었다. 아이비리그 대학교수 중 첫 한국인 교수였다. 귀인(貴人)을 얻기 위해서는 서릿발 같은 권위도 내려놓아야 하는 법이다. 팔 것이라고는 가발과 의류가 전부이던 60년대, 편지글 속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촉한의 유비처럼 제갈량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三顧草廬)했던 심정이 담겨 있다.


두 거인의 서신은 세종시 국가기록원 본원 수장고 속에 잠자고 있었다. 기록원 홈페이지의 일반 검색으로는 서신을 찾을 수 없었다. 아직 디지털 작업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검색 목록에서조차 제외됐던 것이다. 누렇게 빛바랜 편지지에는 60년대 중반 대통령과 재미 과학자의 과학입국의 고민과 안타까움·열정이 꾹꾹 담겨져 있었다. 그 56건 중에는 김 박사가 한국을 찾아 청와대에 들를 때마다 박 대통령이 ‘김완희 박사. 건승을 기원합니다-박정희’라고 쓴 짧은 글과 함께 1000~2000달러씩 넣어준 금일봉 봉투도 있다. 박 대통령이 당시 과학 불모지였던 한국 땅에 꽃을 피우기 위해 해외 인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 박사는 엄혹한 유신체제하에서도 박 대통령에게 고언(苦言)이 담긴 편지를 허물없이 보내기도 했다. DJ(김대중) 납치사건(73년 8월 8일)이 벌어진 이듬해인 74년 1월 편지에서는 ‘요즈음 매일같이 여기 보도기관들이 한국에 대한 좋지 못한 기사와 뉴스를 전해 걱정이 되며, 또 각하께서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염려가 되어 다시 서한을 올립니다. 미국에서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교정하여야 됩니다. 현대는 일개 국가가 단독으로 살아나가지 못하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라며 강대국인 미국과 좋은 외교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 대통령과 김 박사의 우정은 가족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56건의 편지 속에는 김 박사의 부인 노정숙씨가 육영수 여사와 장녀 박근혜 대통령 등에게 썼던 편지도 들어있다. 김 박사는 자신의 회고록 『두 개의 해를 품고』(1999년)에서 “부부 동반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박 대통령과 얘기를 나눌 때면 아내는 항상 육 여사와 별실에서 따로 환담을 했다”고 회상했다. 육 여사는 69년 12월 편지에서 ‘보내주신 화장품은 쓰고 있는 것이 조금 남아 있기에 아직은 사용해보지 않았지만, 아무거나 잘 맞는 피부이니까 아마도 괜찮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우리 국산 화장품도 아주 품질이 좋아져서 꽤 쓸 만합니다. 너무 염려 말아주시기 바랍니다’며 평소 근검절약하는 퍼스트레이디의 모습을 비쳤다.


노씨는 74년 3월 육 여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지난 2~3개월간 여기 유명한 신문지상에 계속하여 우리 한국의 기사가 실렸는데 아주 좋지 않은 내용들입니다…’라며 미국의 여론을 전달하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은 박근혜 대통령이 1976년 8월 11일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의 영정을 사이에 두고 김완희 박사 부부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중앙포토]

노씨는 육 여사 사후인 77년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해온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저희 박사님 서울 가시는 편에 속옷 몇 가지와 아버님 편하게 입으실 옷(바지는 키에 따라서 재단하시기를 바라며), 그리고 지만군께 요즘 입을 수 있는 점퍼를 보내오니 잘 맞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도 보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도 지난해 자신의 증언록에서 김 박사와 박 전 대통령 간 서신 교환을 증언했다. 그는 “해외의 고급 두뇌를 유치하거나 일 잘하는 각료를 격려할 때 대통령의 친필 서신은 감격과 분발의 원천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60년대 미국 컬럼비아대의 잘나가는 교수였던 김완희 박사에게 온갖 정성을 들여 서울에 초빙, 정착시켰다. 대통령이 10여 년간 그에게 보낸 편지는 100통이 넘는다고 한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컬럼비아대 교수로 있으면서 66년부터 한국과 미국을 오갔다. 대통령의 특별자문과 상공·체신 및 과기처 장관 고문으로 활동하며 한국 전자사업의 기초를 닦았다. 당시 한국 정부의 전자공업 육성 기본정책을 수립한 사람이 김 박사다. 그는 10년 넘게 지속된 박 전 대통령의 귀국 요청에 78년 결국 컬럼비아대 종신교수직을 내던지고 한국으로 돌아와 전자공업진흥회 상임회장과 전자공업협동조합 이사장 등으로 활동했다.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은 79년 10월 26일 오전에야 끝났다. 그날 오전 김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컬러TV의 국내 시판을 허락해 국내 전자업계를 살려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는 그날 밤 숙박한 충남 아산의 도고온천에서 박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완희 박사와의 인연 외에도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과학기술 발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과학자를 아낀 지도자였다. 2대 과기처 장관과 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을 지낸 최형섭 박사는 자신의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에서 ‘나는 KIST가 자리를 잡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박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설립 후 3년 동안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눠 연구소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주었고, 장관들의 반대에 부닥칠 때마다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고 회고했다.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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