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어귀에는 나무가 세 그루 있다. 상수리나무, 주목, 그리고 보리수나무. 나무들 앞에는 비석도 없고 떼도 벗겨진 초라한 봉분 하나가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그런대로 하나의 풍경 속에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인상적이다. 특별히 산소를 오가거나 관리하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지만, 부근에는 별다른 잡초 없이 낮게 하늘거리는 풀들이 부드럽게 뒤덮고 있어 묘한 느낌이 난다. 처음 이 동네를 들어서며 만난 이 풍경이 아직도 선명하게 다가오는 걸 보면, 공간 하나가 주는 의미가 결코 작지는 않은가 보다.
가만히 풍경을 음미해 본다. 살랑거리는 봄바람. 막 새잎을 틔운 상수리나무도,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주목의 진한 초록빛도, 거침없이 뻗어나간 보리수 잎사귀도, 무덤 앞을 뒤덮은 풀들도 함께 살랑거린다.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의 말마따나 싱그러운 가지 부드럽게 흔들어 대며 세상모르고 나부끼는 나무들, 너희가 부럽기만 하구나!
사방이 연둣빛인 봄의 한가운데. 이토록 좋은 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 가족은 텃밭과 화단을 꾸며 보기로 했다. 모두 처음 해보는 생소한 일. 책을 사고 인터넷을 뒤져 보긴 했지만 실제와 같을 수는 없다. 그나마 아파트에서 적지 않은 화분을 성공적으로 가꾸어 왔던 경험이 도전의 밑천이나 되어줄지 모르겠다.
일단 텃밭은 집 뒤로, 화단은 거실에서 보이는 앞마당으로 자리를 정했다. 동네 철물점에 들러 호기롭게 부삽을 비롯한 텃밭 도구들을 장만한 후 땅부터 갈아엎었다. 머릿속에는 마트에 잘 진열된 쌈채와 꿈속에서나 나올 듯한 꽃나라 들판이 일찌감치 자리한 상태.
거름을 구해 섞고, 화원에서 씨앗을 종류별로 한 아름 구입했다. 이왕 해보는 것, 새싹부터 시작해 최종 수확물까지 내 손으로 거두어 보고 싶다. 햇빛도 잘 비추어 주니, 물만 잘 주고 비료만 좀 추가해 주면 근사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채소와 꽃이 채워진 어엿한 화단이 완성되겠지?! 이제 남은 건 기다림뿐. 온 가족이 텃밭과 화단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주변에서 식사도 하고, 책도 읽는다. 그래, 이런 봄날만 계속된다면야 옛 선인들처럼 작은 초막 하나만 있다 한들 더 필요한 것이 무얼까 싶다.
이장희 ?대학에서 도시계획을 전공하고 뉴욕에서 일러스트를 공부했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의 저자.?오랫동안 동경해 온 전원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 서울과 파주를 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