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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령만 배운다고 논술쓸수 있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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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학 l학년 영어 강독시간에 영어를 좀 한다고 자신하던 한 친구가 호명을 받자, 그는 『직역을 원하십니까, 의역을 원하십니까?』하고 물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허튼수작을 용납않기로 유명했던, 이제는 고인이 되신 송욱교수는 『직역과 의역이 따로 있는것이 아니라 잘된 번역과 잘못된 번역이 있을 뿐이야』 하시며 그 건방진 질문을 일축해 버렸다. 대학 입시의 출제양식에 관한 논의, 특히 객관식과 주관식출제양식에 관한 시비에 귀를 기울이느라면 벌써 30년전 그 말씀이 생각난다.
지금 현재 언론계를 포함한 우리사회 일반의 여론은 대학입시의 출제양식이 객관식이 되다보니하급학교의 교육이 연필굴려 정답찾기식의 요령교육이 되어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뜻을 말과 글로 바르게 표현할줄아는 능력을 기를수 없었으며, 따라서 입시의 출제양식이 점차주관식으로 바꾸어야 된다는 폭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는듯 하다. 그러한 여론의 반영으로 채택된 것이 내년부터 실시된다는 논술고사이고, 그 논술고사 실시요강을 만드는 과정에서 대학들이 별로 열의있는 반응을 보이지않자, 일부 언론은 대학이 자율성을 회복하고 하급학교의 교육내용을 강화시킬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는 일에 주저함을 보인다고 호되게 비평했다.
궁지에 몰리게 된 대학들이 가능한한 배점을 줄이는 방향으로 논술고사 성적반영세침을 발표한후 신문지상을 통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논술고사에관한 논의를 주의깊게 보는 사람들은 왜 대학들이 그일에관해 그처럼 주저함을 보였었는지 이제 조금은이해가 가리라 믿는다. 『동국대지망생을 위한 가이드』 니 『외국어대 지망생의 시범답안에 관한 강평』이니 등이 날마다 실리는것을 보고있노라면 마치 서강대식논술과 중앙대식논술이 따로 있으며 오랜 시일에 걸친 독서와 사고의 훈련이 없이도 요령만 터득하면 논술이라는 것이 써질수 있는것인듯한 인상이 풍기기도한다.
이런 요령제일주의 풍토에서 논술고사라는 것이 과연 그 실시과정에서 학생당사자·지도교사·대학의 채점자들이 겪어야 하는 불안과고충을 정당화할수 있을 만큼의 목적하는 효과를 거둘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교육이 잘못된 것이 객관식 출제양식 때문이었는가? 주관식과 객관식출제양식 사이의 차이란 물론 외국어의 번역이 의역이냐, 직역이냐를 따지는것 같은 요설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어느것도 제대로 운영되는가, 안되는가에 따라 효율성이 결정되는 것이지 그 자체로서 어떤 절대적인 성과를 보장하는 것이 못된다 함에서는 마찬가지다. 주관식·객관식을 막론하고 교육적성과를 거두려면 출제와 채점과정에서 각기 필요한여건이 갖추어지고 성실하게 운영되야 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심한 부작용을 낳게 마련이다.
주관식시험이란 한마디로 말해 출제는 간단하나 평가의 부담이 큰 시험양식이고, 객관식이란 반대로 채점과정을 간편화내지 기계화 할수있게 출제를 복잡하고 다양하게 하며 그만큼 정성과 기술이 필요한 시험양식이다. 그 어느것이고 제대로 활용되면 깊이있게 공부한 학생들만이 좋은 점수를 받게 되는것은 마찬가지며, 잘못될때는 수박 곁핥기식의 얄팍한 지식을 가진 학생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주관식 평가방식이 성공적으로 운영되려면 교사 또는 채점자 한사람 한사람이 담당해야 하는 학생이나 수험자의 수가 적어서 답안지 한장 한장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수 있어야 하며 채점자의능력이나 권위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이어야 한다. 주관식에는 문자그대로 채점자의 주관적 판단이작용할 여지가 많으며 그에대한 항의가 통용될수 없다. 이것은 아직도 교육이 통일된 교과서의 사용등으로 획일화되지 않은 상황이나 시대에 가장 적합한 시험방식이다.
객관식이란 교육의 대중화추세에 따라 개발된 시험양식이다.
소수의 인원이, 또는 기계가 많은수의 답안지를 한꺼번에 채점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사용되는 방법이지만 출제기술의 발달에 따라 간단한 지식만이 아니라 복잡한 사고의 능력·창의력·문장력까지도 시험할수 있는 매우 다양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곧 그러한 객관식 시험을 보기위해서도 학생들은 주관식시험을 보기 위해서나 마찬가지로 많이읽고 쓰고 생각하는 훈련을 받지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객관식출제양식이 교육을 저해하는 원인으로 지적될만큼 오인된 것은 우리 문교부가 출제과정의 간소화를 위해 문제양식을 객관식중에서도 매우 초보적인 4지선다형으로 제한시킴으로써 객관식출제가 성공적으로 운영될수있는 제1조건을 무시해 버렸기 때문이였다.
객관식출제양식에 필요한 능력과 기술과 정성이 투입되지 않았을때 그것이 심한 부작용을 낳을 것은 정해진 이치이며 그러한 부실한태도와 적절치 못한 여건하에서는 주관식을 사용한다 해도 훌륭한 효과를 기대할수 없는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대학지망인구는 70만명을 넘는다는 소식이다. 누가 무슨 능력으로 70만명분의 논술을 단기간내에 공평하게 채점해 낼것인가. 학생들의 글쓰기능력의 훈련은 절실히 요청되지만그것은 작문교육및 일반교양교육의확충으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지 현실에 맞지않는 시험방식으로의 전환으로 이루어질수있을지는 매우 의문스러운 일이다.
출제양식의 문제보다 더 절실하게 재평가가 요청되는 것은 중고등학교 교과목들의 백화점같은나열과 빈약한 교과서에만 의존하는 교육과 출제방침이다.
마치 정치·경제나 사회·문화는제외한 역사가 따로 있는듯이 교육받고 있는 학생들이 개인의 도덕적 삶이나 사회문제 일반에 관해 통합되고 균형잡힌 인식을 가지고 논술식으로 자기의견을 피력할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무리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다. 필요한 것은 임시에 해당되는 과목수만을 줄이는 일이 아니라 공부하는 과목들의 수효를 줄여 보다 더 의미있는 큰 단위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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