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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연설문 담당, 최후의 문혁소조 치번위 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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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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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대혁명(문혁) 당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중앙문혁소조 조원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였던 치번위(사진)가 20일 상하이에서 위암으로 별세했다. 85세.

1966년부터 76년까지 전 중국을 대혼란에 빠뜨린 문혁은 다음달 16일로 발발 50주년을 맞는다. 마오쩌둥(1893∼1976) 주석의 연설문 담당 비서로 필명을 날렸던 치는 19세 때 중국 최고 지도부의 집단 거주지인 중난하이(中南海) 기밀 담당 비서로 선발됐다. 치는 마오 주석이 문혁 4인방이었던 야오원위안(1931~2005)과 함께 ‘난야오베이치’(南姚北戚· 남에는 야오원위안, 북에는 치번위란 뜻)란 별칭이 붙을 정도로 중용한 인물이다. 문혁 초기 당 이론지 ‘홍기(紅旗)’의 역사조 조장이었던 치는 마오의 신임을 배경으로 류사오치 국가주석에 대한 탄압을 주도했다.

하지만 67년 7월 그는 저우언라이 총리의 건의로 마오에게 ‘앞잡이’로 낙인 찍혔다. 이듬해 반혁명 혐의로 베이징 친청 감옥에 수감돼 18년간 옥살이를 했다.

최근까지도 극좌파 노선을 신봉한 치는 2014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시진핑 주석은 마오 이후 반(反) 부패를 실천한 유일한 국가지도자”라며 “마오쩌둥이 애써 도모한 무산계급혁명의 후계자이자 제2의 마오쩌둥”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2월 병석에서 구술한 회고록이 홍콩에서 출판될 예정이다. 문혁 전문가인 진광야오 푸단대 교수는 “치번위는 문혁 초기 홍위병 운동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라며 “문혁을 충분히 반성하지 않은 채 여전히 60년대 입장에 서있었다”고 평가했다.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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