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위안스카이(袁世凱)와 중난하이(中南海)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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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총선이 끝난 후 어느 모임에 나갔다. 모두들 새누리당의 패인(敗因)에 대해 한마디씩 하면서 대통령의 소통부족이 총선에서 패배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다.

반면에 색다른 패인으로 청와대를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통부족의 원인을 사람에서가 아니고 환경에서 찾고 있다. 청와대의 환경이 그곳에 사는 사람을 제왕적으로 만들고 제왕처럼 행동하다 보니 소통이 잘 안 된다는 설명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북쪽을 쳐다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웅장한 모습의 청와대이다. 지금의 대통령뿐만이 아니라 역대 대통령은 정치가로 소통의 달인이고 그래서 대통령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일단 대통령이 되어 구중궁궐(九重宮闕) 같은 청와대에 들어가면 소통을 거두고 명령과 지시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임기 말년에는 이러한 일방통행이 심화되는 것도 청와대가 주는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일제(日帝)는 조선 왕조의 정궁 경복궁 흥례문(興禮門)을 포함한 전각들을 헐어낸 자리에 총독부를 지었다. 총독부가 완성된 후 총독관저도 인근에 새로 지어 옮기기로 한다. 일제는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경복궁 후원으로 과거 역대 왕족들이 활쏘기 등 무예에 힘쓰던 경무대(景武臺)를 헐어내고 그곳에 총독관저를 지었다. 이른 바 ‘경무대 총독관저‘에는 미나미 지로(南次郞) 7대 총독이 처음 입주하였다.
해방이 되자 미군의 존 하지 중장이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가 물러간 그곳에 일시 거주하였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경무대 총독관저’를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했고 4.19 이후 독재의 상징인 경무대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청와대는 노태우 대통령을 거치면서 지금의 형태인 권위주의적 건물로 구성되었다. 청와대의 위용과 내부구조는 문민 대통령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어느 문민 대통령은 청와대를 옮기고 현재의 건물은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까지 했으나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유야무야 되었다고 한다.
수백명이 근무하는 행정기관이면서 다양한 행사를 할 수 있는 청와대를 내 주고 다시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마련하는 데는 상당한 예산이 소요되고 더구나 경호상 더 좋은 위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

청와대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보니 중국의 청와대 중난하이(中南海)가 연상된다. 중난하이도 우연인지 청와대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중난하이는 중국 왕조 시대의 정궁(紫禁城)의 후원(皇家園林)이었다.

과거 베이징을 수도로 한 금조(金朝)와 원조(元朝)의 궁궐은 지금의 자금성 북쪽에 있었다. 인공호수인 베이하이(北海)와 중하이(中海)는 태액지(太液池 황실정원의 호수)로 존재했고 명조(明朝)의 영락제가 자금성을 지으면서 난하이(南海) 추가로 파냈다. 그 파 낸 흙으로 산을 만들었으니 지금의 징산(景山)이다. 베이징에는 예부터 물이 귀해서인지 작은 호수라도 바다(海)로 표기하는 예가 많다.
중난하이는 청조 말기 실권자 서태후(西太后)가 좋아하였다. 철도를 신기하게 생각하는 서태후를 위해 중국 최초의 철도가 중난하이에 부설되었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의 난으로 서태후가 시안(西安)으로 피난을 갔을 때 러시아 군이 중난하이의 서태후 궁궐을 점령 수많은 보물을 수탈해 갔다고 한다. 그 후 중난하이는 8국 연합군의 사령부가 된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망한다. 쑨원(孫文)과 함께 청조 멸망의 공을 세운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쑨원의 양보를 받아 대총통이 된다. 그는 황제가 되고 싶은 야심가였다. 그가 총통부로 정한 곳은 과거 청조의 황실 후원이었던 중난하이였다.

위안스카이는 황실의 후원에 총통부를 정함으로써 자신의 부족한 정당성을 황실의 권위를 통해 보충 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일제가 조선 왕실의 정궁 경복궁의 일부를 헐고 총독부를 지은 것이나 경복궁의 후원의 경무대에 총독관저를 지은 것도 침략의 콤플렉스를 조선 왕실의 권위를 통해 극복하여 조선 민족을 통치하려는 의도와 발상은 비슷해 보인다.
위안스카이는 중난하이의 전각 하나를 개조하여 장안(長安)대로에 나오는 문을 만들었다. 건륭제가 지은 보월루(寶月樓)라는 전각이 신화문(新華門)이 된 것이다. 위안스카이는 자금성을 둘러싼 6m 높이의 붉은 담장을 헐고 새로운 문을 만든 셈이다.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새로운 중국(新華 New China)의 황제가 되면서 총통부를 신화궁이라고 이름을 바꾼다. 위안스카이는 반대파의 압력에 황제의 지위를 포기하고 곧 사망한다. 위안스카이가 죽고 나서 중난하이는 그의 부하였던 군벌들이 차례로 차지하였다.
1928년 장제스(蔣介石)의 북벌이 성공하면서 베이징이 장제스의 국민당의 지배하에 놓인다. 장제스는 중난하이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수도를 난징(南京)으로 옮기고 권력의 중심이었던 중난하이를 시민들에게 돌려주었다. 베이하이 공원과 마찬가지로 중난하이도 시민공원(public park)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겨울에는 스케이트로, 여름에는 보트를 타고 베이하이에서 중난하이로 자유롭게 다녔다.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이 베이징을 점령했다. 그리고 신중국을 선언했다. 장제스의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쫓겨났다. 마오쩌둥 등 공산당 지도부는 공산당 중앙을 어디에 둘 것인가 고민했을 것이다. 과거 위안스카이가 총통부를 삼은 중난하이를 선택했다.
중난하이는 당 중앙과 국무원 그리고 정부요인의 거류구가 되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시중쉰 등이 가족과 함께 살았다. 시중쉰의 아들로 국가 주석이 된 시진핑은 중국 지도부 중에 2대에 걸쳐 중난하이에 사는 유일한 케이스이다.

중난하이는 20여 년 간 시민의 품에 있다가 다시 정부기관으로 돌아갔다. 장안대로에서 보이는 중난하이의 정문인 신화문에는 ‘위대한 중국공산당 만세’ ‘불패의 마오쩌둥 사상 만세’의 구호가 있다. 문안의 영벽(影壁 screen wall)에는 ‘인민을 위한 복무(爲人民服務)’는 마오쩌둥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주말에 베이하이대교에서 바라보면 북쪽의 베이하이 공원은 베이징 시민들로 붐비지만 다리아래 호수로 연결된 남쪽의 중난하이는 너무 조용하여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인다. 사복 경찰의 경비가 삼엄하여 시민의 접근이 차단되어 있다.

과거 중국의 지도자가 황제처럼 보이는 것도 중난하이가 주는 환경과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덩샤오핑은 중난하이 생활에 불편을 느꼈다고 한다. 그가 최고 실권자이지만 현직을 내려놓자마자 중난하이를 떠나 고루(鼓樓) 근처의 자신의 집으로 재 빨리 이사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장래 언젠가 생각이 다른 대통령이 나와 조선왕조 왕궁의 일부인 지금의 청와대를 서울시민에게 돌려주고 ‘사람냄새’ 나는 새로운 청와대를 마련할지 모른다. 중국의 지도자도 장래 언젠가 중난하이를 베이징 시민에게 되돌려줄지 모른다. ‘중난하이’와 ‘청와대’ 어느 쪽이 먼저 시민의 품에 안기는 날이 올는지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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