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성이탈자 속출…협상 불가피 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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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는 근로자들이 6박7일 1백30시간동안 극한농성을 벌였던「대우사건」은 마지막까지 버틴 농성자수가 실제로는 1백70여명에 불과했는데도 대우측이 3백여 명으로 이를 오판, 농성자 세력을 과대평가 함으로써 이의 대비에 큰 혼선을 빚었던 것으로 지적되고있다.
관계자들은 결국 회사측이 소수 극렬파에 끌려다닌 꼴이 됐다고 지적, 이와 관련해 앞으로는 기업체내의 노무관리제도가 보다 강화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우의 경우 이 같은 조직미비로 노사문제에 그룹의 총수가 직접 나서서 동분서주하는 바람에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가령 노사문제 전담이사 같은 제도적인 장치가 돼있었다면 정확한 정보파악 등으로 이번 같은 사태는 확대되기 전에 미리 막을 수 도 있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대우의 경우 지난15일 임금인상농성에 동조하던 근로자가 당초에는 3백 여명에 불과했으나 이날하오 5시3O분『김 회장이 임금문제 타결을 위해 공장에 왔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농성자수가 갑자기1천 여명으로 불어났었다.
농성에 참여했던 근로자들로부터 6박7일의 악몽을 들어본다.
◇파업=파업이 시작된 것은 16일 상오 8시부터. 이에 앞서 김우중 회장은 파업을 주도한 근로자대표들을 힐튼호텔로 불러 밤새 술을 먹이며 이들을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파업하기 전날 김 회장이 농성근로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부평공장현장에 나타나자 근로자들은『와! 김 회장이 나타났다』고 함성을 지르며 환호했다. 김 회장이 나타나자 주동자들은 기고만장한 듯 기세를 올렸다.
김 희장은 웃는 표정으로 근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이때부터 근로자들 사이에서는 『김 회장이 나타났으니 사태는 우리가 좌우하게 됐다』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김 회장이 직접 농성자 앞에 나타남으로써 그들의 기대를 크게 높여준 셈이 됐다.
◇농성시작=농성이 시작된 것은 지난 19일 하오.
이날 하오3시30분 공장후문 2m높이의 철문을 뛰어넘어 들어온 해고근로자 송경평씨가 당시 공장 안에서 농성 중이던 2천여 근로자들을 향해 선동발언을 하면서부터였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부당 해고 된 나도 복지를 위해·노력하고 있읍니다. 여러분의 행동은 회사 밖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습니다』
최명걸사장실과 맞붙은 기술연구소는 삽시간에 수라장으로 변했다. 회사 내 귀중문서· 설계도 등이 담긴 11개의 파일박스와 66개의 책·걸상은 한쪽으로 밀려나고 일부는 출입문 안쪽의 바리케이드로 이용됐다.
농성자 들에겐「18·7%고수」「제 수당 지급하라」고 쓴 머리띠가 분배됐고, 엔진과· 프레스과·차체과 등 18개의 작업장별로 조를 편성, 10∼20명씩의 조원 중에서 조장을 선출했다. 조장들에게는 나중에 회사측과 협상을 벌일 때 강경한 발언으로 협상을 뒷방침해주기로 하는 등의 임무가 주어졌다.
그리고 조별로 경계근무 조를 편성해 계단에 3명, 화장실 입구 쪽에 2명, 3개의 창에 각각 3명씩 모두 14명이 1시간30분씩 교대로 배치됐다.
토요일인 2O일 날이 밝자 새벽부터 근로자들이 정문 쪽에 몰려들기 시작해 상오 7시4O분에는 4백 여명으로 불어났다. 철야농성에 동참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달려나온 근로자들이었다.
20일 하오8시쯤 농성자 내부에『전경대원들이 오늘밤 농성 장에 침투해 들어온다』는 말이 나돌았다.
농성장안은 갑자기 당황한 분위기로 급전했다. 농성자 들은 충혈 된 눈알을 굴리며『쇠파이프를 준비해 우리도 무장하자』『여차하면 불을 질러버려』라고 외쳤다.
그리고 경계 조를 제외한 나머지 근로자들이 농성 장을 빠져나와 건물 앞 신축공사장에서 엄지손가락 2개만한 굵기의 길이 1·2m가량의 쇠파이프 3백여 개와 자갈 반 가마, 신나가 든 2되들이 플라스틱 통 10개, 각목 수십 개를 운반해 각자「중무장」을 했으며 농성 장에 오르는 계단입구는 날라 온 쇠파이프를 엮어 바리케이드를 쳤다.
농성 시간이 흐르면서 근로자들의 의심도 차츰 커져갔다. 이날 .아침부터『바깥에서 들여오는 음식물에 불순물이 들어있을지 모른다』는 말이 나온 것과 때를 맞추어서였다.
회사측에 대한 극도의 불신이 근로자들 사이에 팽배해있었다.
회사측에서 제공한 음식을 거부하자 농성장은 아침을 굶은 농성자 들의『밥을 달라』는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 회사측에서는『식당에 식사를 준비했으니 그곳에 가서 식사를 하라』고 했으나『우리들을 밖으로 유인해내려는 수법』이라며 이에 응하지 않아 이날은 아침과 점심을 꼬박 굶었다.
이날 하오 11시4O분쯤에야 회사측이 농성장 복도에 운반 해다 놓은 3백50명분의 식사에80인분을 더 추가해 주렸던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이미 농성자들은 대부분 극도로 피로를 느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이탈=농성자중 이탈자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 은 21일 새벽이었다. 이날 상오4시30분쯤 이탈을 막기 위해 내부경비를 서고있던 자동차 부의 이모 군 등 2명이 농성 장 천장을 뜯어내고 빠져나갔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농성 장은 크게 술렁거렸다. 그려나 이탈자는 계속 늘어나 21일과 22일 이틀 간 모두 8명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농성 장을 빠져나갔다.
이들 중 조모씨(28·차체1과)은『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말을 남기고 농성 장을 나왔고, 고모씨(26)은『세수를 하러간다』며 이탈했다. 이렇게 농성 장을 빠져나간 사람은 1백27명에 이르렀다. 이 같은 이탈자는 23일에도 7명, 24일에도 11명이 발생하는 등 모두 1백27명으로 늘어나 모두 1백30여명에 이르렀다.
이 같은 이탈자의 증가는 가뜩이나 지쳐 기진맥진한 상태의 농성자 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이점이 농성주동자들에게 압력을 주었고 농성자 전원에게 불안감을 가중시켜 사태해결을 촉진하는 주요원인이 됐다.
◇방화위협=22일 하오5시쯤 일부 판매직 직원들이 농성 장에 접근해 바리케이드를 치우려고 하면서부터 농성장안의 분위기는 다시 살벌해졌다. 이탈자가 늘어나면서 초조해진 주동자들은『우리도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말과 함께『농성장 근처에서 물러서지 않으면 건물에 불을 지르고 말겠다』며 악을 썼다.
농성근로자중 3∼4명이 임원 실로 이어지는 벽과 천장의 베니어판에 직경 30㎝가량의 구멍을 뚫고 신나를 묻힌 솜뭉치를 보이며 옆 동료에게『성냥을 달라』고 소리쳤다.
이 바람에 농성장 입구까지 접근했던 20여명의 직원들이 기겁해서 달아났고 곧 이어 인천북부소방서에서 소방차2대가 달려오기도했다.
방화의 위협은 큰 효과(?)를 거두어 사장실이 본관3층에서 제1승용차 공장으로 급히 이동했고 그때까지 농성장 옆의 회의실에 마련됐던 기자실도 이모 전무 방으로 옮겨졌다.
농성자 들의 대규모 이탈에 이어 이 같은 방화위협사건이 벌어지면서 농성근로자 내부에서는 점차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근로자들 가운데 몸살과 설사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이 생겨나 동요의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노무관리의 허점=농성장안의 근로자들이 계속 이탈해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었는데도 회사측은 당초의 3백4O명 중 4∼5명만 이탈한 것으로 판단, 협상과정에서 크게 양보해야하는 허점을 드러냈다.
정보에 어두워서 손해를 본 셈이었다.
노무관리에도 문제점이 있어 24일 밤 김 회장이 농성근로자 대표들과 마지막 협상을 위해 농성 장에 들어 갈때 한 임원이 따라 들어가려 했으나 농성 자들은『당신의 평소 행동으로 보아 상대할 필요가 없다』면서 그 임원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기도 했다.
이런 점을 들어 관계자들은『대기업에서 노무관리가 이렇게 엉성할 수 있느냐』고 의아해했다.
◇헙상종용=농성근로자 사이에서는 차츰 김 회장과 농성자 대표사이의 협상을 기다리는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했다. 누구도 앞장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이제 그만 농성을 풀었으면…」하는 눈치들이 역력했다.
그때 농성자 김모씨(26·차체과)의 아버지(58)가 전남담양군에서 올라와 농성 장 계단 바리케이드 앞에 서서 쉰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어서 밖으로 나와라』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때까지 가족들의 면회를 일체 불허하기로 했던 농성장안의 방침을 바꿔 주위에서『한번 나가 보라』며 김씨의 등을 밀어냈다.
이때 계단까지 내려가던 김씨가 아버지에게 멱살을 잡힌 채 농성 장 밖으로 끌려나가자 농성자들의 허탈감은 더욱 커졌다.
그와 함께 어렴풋이 이탈자에 대한 동경심이 일기도 했다.
철야농성 6일째인 24일 김 회장과 홍영표씨 사이에 마라톤협상이 시작되면서 근로자들은 사태해결을 갈망했고 그렇게 사태는 해결됐으나 결국 근로자들은『우리만 속았다』고 불평했다.
이른바 리더였던 홍씨등 14명은 뒷담을 넘어 도망쳐버렸고 근로자들만 경찰에 끌려가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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