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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양적완화’ 운명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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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종윤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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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윤
국제경제팀장

새누리당은 20대 국회가 개원하면 100일 내에 한국은행법을 개정하겠다는 총선 공약을 지난 7일 발표했다. 강봉균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장이 처음 꺼낸 한국형 양적완화 시행을 위해서다. 한국형 양적완화는 실체가 묘하다. 산업은행이 발행한 산업금융채권(산금채)과 금융회사가 보유한 주택담보대출증권(MBS)을 한은이 발행시장에서 인수토록 한다는 내용이다.

한은은 공개시장조작을 위해 유통시장에서 채권을 사고판다. 발행시장, 곧 발행 주체로부터 직접 채권을 사는 건 법으로 제한하고 있다. 한은법(75조, 76조)에 따르면 ‘국채’나 ‘정부가 지급보증하는 채권’만 한은이 직접 인수할 수 있다.

산금채와 MBS는 정부가 지급보증하지 않는다. 한은법 개정이라는 공약은 그래서 나왔다. 덩달아 한국형 양적완화의 운명은 유권자의 몫이 됐다. 그렇기 때문에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공약의 목적과 취지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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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의 원래 이름은 ‘대규모 자산매입(large-scale asset purchases : LSAP)’이다. 중앙은행의 기준금리가 제로(0)가 되면 기준금리 조정을 통한 통화정책을 쓸 여지가 줄어든다. 이때 장기금리를 떨어뜨리는 방법이 있다. 중앙은행이 유통시장에서 국채나 정부보증 채권 등 장기채를 사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이런 채권이 귀해지면서 값이 오르고 수익률(금리)은 떨어진다. 이제 투자자들의 눈길이 다른 증권으로 갈 차례다. 회사채 같은 원금이 보장되지 않는 채권이다. 결국 회사채 가격도 오르고 금리가 낮아지니 기업 입장에서는 회사채 발행을 확대할 수 있다. 이렇게 확보한 자금으로 투자의 물꼬를 터 고용을 늘리게 된다. 양적완화가 경기부양 효과를 내는 방식이다.

일본은행(BOJ)이 2001년 처음 도입했고, 유럽중앙은행(ECB)도 지난해 3월부터 양적완화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꽃이 핀 건 미국에서다. 연방준비제도(Fed)는 2009년 3월부터 5년7개월간 총 세 차례 양적완화를 실시해 시장에 4조 달러를 쏟아부었다. 이 덕에 미국 경제가 살아났다. Fed는 지난해 12월 7년여 만에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려 제로금리에서 탈출했다.

‘한국형 양적완화’는 다르다. 강봉균 선대위원장은 지난 7일 이렇게 말했다. “(한국형 양적완화는) 미국·일본처럼 시중 자금을 풍부하게 하는 게 아니다. 경제 구조를 바꾸는 게 목적으로 한은의 지원을 받자는 것이다.”

산업은행이 산금채를 한은에 넘겨 마련한 자금을 기업 구조조정에 쓰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한은이 금융회사로부터 MBS를 사는 것도 가계의 거치식 주택담보대출을 장기분할대출로 갈아타는 걸 지원하기 위해서다. 양적완화 앞에 ‘한국형’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설명된다. 경기부양이 아니라 구조조정 대책이기 때문이다.

선거가 프레임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나갔다. 한은엔 이미 이런 지원책이 있다. 특별융자(특융)다. 금융통화위원 4명의 찬성으로 ‘자금 조달 및 운용의 불균형으로 유동성이 약화한 금융기관’에 긴급 여신을 할 수 있다(한은법 66조). 사례도 많다. 1985년 도산위기 해외 건설사 및 해운사 지원, 97년 은행·종금사·증권사 지원, 2008년 은행권 자본확충펀드 지원 등이 대표적이다. 기존의 구조조정 지원제도를 한국형 양적완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건 놀라운 상상력이다.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하겠다는 것도 과하기는 마찬가지다. 지금도 산금채는 발행되면 시장에서 전량 소화된다. 올 3월 말 기준 산금채 발행잔액은 88조원에 달한다. 발행금리(3년물 기준)는 1.53%다. 기준금리(1.5%)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시장에서 잘 팔리는데 굳이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지금 한국 경제가 겪는 어려움은 유동성 부족이 아니라 구조적 경쟁력 하락이다.

한국형 양적완화는 애초부터 문제의 원인을 잘못 짚어 나온 처방이다. 더욱이 공약으로 내건 이 프레임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만약 여당이 이번 총선에서 과반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면 공약(公約)은 물거품이 된다. 이렇게 되면 기업 구조조정을 포기한다는 말인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구조조정과 관련해 엇갈린 신호를 보냈다. 그는 11일 울산 유세에서 “현대중공업 근로자 여러분이 구조조정 없이 일할 수 있도록 특별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조선 경기는 지금 최악에 몰려 있다. 그런데도 당 대표가 의석 하나 건지겠다고 공약을 뒤집는 말을 했다. 유권자는 혼란스럽다. 영업해 번 돈으로 이자도 못 갚고, 빚으로 연명하는 한계기업의 비중은 2014년 말 기준으로 10.6%에 달한다. 한계기업은 경제 전체 생태계를 황폐하게 하는 악성 종양이다.

한국 경제를 살릴 골든타임은 20대 국회 개원 후 연말까지 길어야 6~7개월이다. 이후부터는 대통령 선거라는 블랙홀에 빠지게 된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마지막 기회다. 이를 놓치면 한국 경제는 저성장의 덫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구조개혁은 유권자의 뜻을 물어 추진할 과제가 아니다. 선거의 날이 밝았다. 결과가 어찌 됐든 구조조정의 닻을 올려야 한다.

김종윤 국제경제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