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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왕위이양 ‘쇼’로 석고대죄해야 했던 ‘사도세자’ …… 대리청정의 덫에 걸리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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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호 1 면

2017년 대학수학능력시험부터 한국사가 필수 과목이 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한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중앙SUNDAY는 과거 연재했던 인기 역사 기획 내용을 토대로 이와 관련한 한국사 교과서 내용을 분석하고, 실전 예상 문제까지 풀어보는 새로운 형식의 NIE(Newspaper in Education)를 게재하고 있습니다.

주제별로 현행 8종의 교과서 내용을 비교해 표로 정리해주는 이 역사 콘텐트는 시험을 준비하는 중·고교생뿐 아니라 역사에 관심 있는 성인 독자에게도 유익한 내용입니다. 중앙SUNDAY 홈페이지(http://sunday.joins.com)를 통해 매주 게재되는 역사 NIE를 통해 한국사와 좀 더 가까이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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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홍봉한 초상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던 혜경궁의 부친 홍봉한은 세자 사후에 동정론으로 돌아서서 노론 벽파의 비판을 받았다.

붕당 간의 세력 다툼이 왕위 계승 문제 및 왕권의 정통성까지 위협하자 영조는 탕평론을 내세우면서 국왕 중심의 정국 운영을 시도했다. 영조는 탕평 정책에 동의하는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여 정국을 운영했다.

[사도세자 사당]전남 무안군 운남면 동암마을에 있는 사도세자 사당. 정조 때 마을 사람들 꿈에 사도세자가 여러 차례 나타나 이 마을에 살겠다고 말한 것을 계기 삼아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사진가 권태균-

한중록(恨中錄)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한 많은 삶에 대해 쓴 회고록. -사진가 권태균-영조는 공론의 주재자로 인식되던 재야 산림을 정치권에서 배제했고, 붕당의 기반인 서원도 대폭 정리했다. 아울러 붕당의 이익을 대변하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과 3사 관리 선발 관행을 혁파하고, 탕평 의지를 내세우기 위해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웠다. 또한 신문고를 부활하고 상언, 격쟁을 통해 직접 백성의 의견을 들어 정책에 반영했다.

? 탕평 정치를 통해 정국을 안정시킨 영조는 민생 안정과 산업을 진흥하기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영조는 군포 징수의 폐단을 바로 잡기 위해, 균역법을 시행하여 군역의 부담을 줄여 주었고, 민생 안정을 도모했다. 그리고 군영을 정비하여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세 군영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 영조는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했다. 그리고 “속대전”, “여지도서”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여 시대 변화에 맞게 문물제도를 정비했다.


? 그러나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을 계기로 기존의 붕당은 벽파와 시파로 다시 나누어졌다. 대부분 노론이었던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하게 보고 영조의 처분도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소론과 노론의 일부, 그리고 갑술환국 이후 정계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다수가 속한 시파는 사도 세자의 죽음을 동정했다.

[사도세자 영정]사도세자는 반(反) 노론의 정견을 표출하다가 영조와 노론의 합작에 의해 살해되었다. -우승우(한국화가)-

? 영조는 탕평 정치로 붕당의 폐해를 억제하고,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백성을 위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탕평책으로 붕당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또한, 탕평파를 자신의 외척으로 끌어들여 정국 안정을 도모한 탓에 척신 정치의 폐해가 나타나기도 했다.


【핵심 키워드】


☞ 영조는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했다. 또한 [“속대전”,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했다.


? 사도세자가 죽음 이후 기존의 붕당은 [벽파]와 [시파]로 다시 나누어졌다.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하게 보고 영조의 처분도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소론과 노론의 일부, 남인 다수가 속한 시파는 사도 세자의 죽음을 동정했다. ☜


【예상 문제와 해설】


1. (가), (나) 인물의 공통점으로 옳은 것은?


(가) 『속대전』과 『속오례의』 등을 편찬하여 시대의 변화에 맞게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나) 『대전회통』과 『육전조례』 등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고, 정치 기강을 바로 잡아 중앙 집권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① 신문고를 부활하였다.


②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였다.


③ 군포 징수 제도를 개혁하였다.


④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⑤ 전국을 대상으로 양전을 실시하였다.

* 2014학년도 9월 모의평가 3번

해설 : 정답 ③

제시된 자료 중 (가)는 영조, (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속대전’, ‘탕평파 중심으로 정국 운영’ 등을 통해 (가)가 영조임을 알 수 있다.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통해 (나)는 흥선대원군임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③ 영조는 균역법을 통해 군역의 폐단을 개선하려고 했고, 흥선대원군은 양반에게 포를 내도록 하는 호포법(동포제, 신포)을 통해 군역의 폐단을 개선했다.


2.?(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최근 그가 심환지에게 보낸 299건의 서신이 공개되어 조선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면사가 세상에 드러났다. 심환지는 (가) 벽파의 영수였다. 경신환국 이후 서인에서 갈라져 선왕(先王) 때에 권력을 장악했던 (가) 으로부터 다시 나뉘어진 당파가 벽파였다. 벽파는 그의 아버지 사도 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했던 당파였기 때문에, 그동안 그와 심환지는 갈등 관계에 있었다고 알려져 와다. 그러나 이처럼 다량의 서신을 주고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다.
① 김효원을 비롯한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② 정여립 모반 사건 이후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었다.


③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으로 북방 개척을 주장하였다.


④ 성리학적 의리론에 구애받지 않고 중립 외교 노선을 취하였다.


⑤ 인간과 사물의 본성에 대해 호론과 낙론으로 나뉘어 논쟁하였다.

* 2010학년도 6월 모의평가 8번

?

해설 : 정답 ⑤

제시된 자료 중 ‘벽파’, ‘경신환국 이후 서인에서 갈라져’, ‘권력을 장악’ 등의 내용을 바탕으로 노론에 대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⑤ 노론은 인간과 사물의 본성에 대한 논쟁, 즉 ‘인물성동이론 논쟁’을 벌였는데, 인성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는 쪽은 낙론(서울, 경기 지역)이고, 인성과 사물의 본성이 다르다는 쪽은 호론(충청 지역)이다.


3.?(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적절한 것은?


○○○○년 ○월

한국사신문

□ 기획 특집 : ‘감필’로 확정된 양역 개혁 방안


국왕은 그간 많은 폐단을 낳았던 양역의 개혁 방안을 발표하였다.다양한 개혁안 중에서 군포의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줄여 주는 감필을 최종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군포를 거두어 운영하던 각 군영의 재정이 절반으로 줄어들어 운영 자체가 어렵게 된다. 조정에서는 감필로 인한 군영의 손실을 보전해 주기 위해 (가)


① 토지 1결당 결작 2두를 수세하기로 하였다.


② 탁지아문으로 재정을 일원화하기로 하였다.


③ 공명첩을 발행하여 재정을 보충하기로 하였다.


④ 민간의 광산 개발을 허용하고 수세하기로 하였다.


⑤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하기로 하였다.

* 2014학년도 수능 11번

?

해설 : 정답 ①

제시된 자료는 영조 때 실시된 ‘균역법’에 관한 내용이다. 영조는 균역법 시행으로 인하여 발생된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결작과 선무군관포를 신설하고 상인세와 어염세 등의 수입을 균역청으로 이관했다.

① 토지 1결당 결작 2두를 수세하기로 한 것이 결작미이다.


4.?밑줄 친 부분에 언급된 정치 운영 과정에서 나타난 상황으로 옳은 것은?


당파의 습성이 고질화되어 손 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 성상께서는 이쪽이 낫다고 생각되면 오로지 이쪽만을 등용하였고, 저쪽이 낫다고 생각되면 다시 저쪽만을 등용하였다. 그렇지만 우리 선왕(先王) 초기까지도 당파가 여전히 싸움을 일삼아 엉킨 감정을 풀기 어려웠다. 이에 선왕이 탕평책의 정사를 행하여 후손을 위한 좋은 계책을 나에게 남겨주었다.

-조선왕조실록-


① 주화론과 주전론이 대립하면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② 노론과 소론이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③ 정여립 모반 사건이 일어나면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④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⑤ 사도 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 2007학년도 6월 모의평가 17번

* 29회 “삼종(三宗)의 혈맥 ① 숙종 2” 편 문제 6

* 36회 “절반의 성공 ② 영조” 편 문제 7

해설 : 정답 ②

제시된 자료는 숙종에 의해 단행되었던 환국에 대한 설명이다.

② 숙종 때부터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했다.

<오답 풀이>

⑤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 격화된 것은 영조 때 나타난 현상이다.


5. 밑줄 친 부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그는 “세상은 모든 사람의 것이니 일정한 주인이 없다. 누구를 섬기든지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또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설을 퍼뜨렸다고 한다. 그가 일으킨 모반 사건에 연구되어 1천여 명이 처벌되는 대옥사가 진행되었다. 이 옥사에서 피해를 입은 정치 세력은 이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상대 당 주요 인물을 응징하는 문제를 놓고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어졌다. 그가 죽고 나서 이 사건을 둘러싸고 모반설과 조작설이 맞서 왔다.
① 조정이 훈구와 사림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② 관료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었다.


③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졌다.


④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었다.


⑤ 관료들이 시파와 벽파로 갈라졌다.

* 2009학년도 9월 모의평가 17번

해설 : 정답 ③

③ 정여립 모반 사건을 처리했던 서인이 선조에 의해 물러나게 되자 동인들은 서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를 놓고 온건파(남인)과 급진파(북인)로 나뉘게 되었다.

<오답 풀이>

⑤ 시파와 벽파는 조선 영조 때 장헌세자(사도세자)의 폐위와 사사(賜死)를 둘러싸고 분열된 파당이다. 뒤주 속에서 죽은 세자를 동정하는 입장이었던 시파는 대부분 남인 계통이었으며, 세자를 공격해 합리화하려고 했던 벽파는 대부분 노론이었다. 장헌세자에 대한 비판과 동정도 정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명분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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