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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39)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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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4호 1 면

? 사도세자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당파 구조를 상수(常數)로 놓고, 나머지 요인을 변수(變數)로 대입해 분석해야 한다. 그 원인(遠因)은 노론과 영조가 관련된 경종 독살설이고, 근인(近因)은 영조 31년(1755)의 나주벽서사건 및 토역경과사건이다. 또한 영조가 재위 35년(1759) 예순여섯의 나이로 열다섯의 정순왕후와 재혼한 것도 주요 원인의 하나다.


? 세자가 만 4세 때인 재위 15년(1739) 1월 영조는 느닷없이 승정원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선위(禪位)하겠다고 선언했다. 만 4세 아이에게 선위하겠다는 선언이 영조의 본심이 아니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세자는 석고대죄해야 했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를 필두로 백관도 전(殿)에서 내려가 관(冠)을 벗고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명(命)의 환수를 요청해야 했다. 그제야 영조는 명을 거두었다.


? 영조는 세자를 만 9세 때 동갑내기 혜경궁 홍씨와 혼인시켰다. 혜경궁 홍씨의 부친 홍봉한(洪鳳漢)은 자신의 딸이 세자빈이 된 지 9개월 만인 영조 20년(1744) 10월 과거에 급제했다. 홍봉한은 소론의 견해를 갖게 된 사위와 척을 지게 된다.


? 세자가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열다섯 살 때인 영조 25년(1749)이었다. 그해 1월 22일 영조는 밤에 승정원에 봉서(封書)를 내렸다.


“내가 감히 삼종 혈맥의 하교를 어기지 못해서 비록 이 자리에 있었지만 남면(南面: 임금의 자리)을 즐겨 하지 않은 마음은 25년이 하루 같아서 날마다 원량(元良)이 나이 들기만 기다렸는데 이제 다행히 열다섯 살이 되었다. 오늘 이 거조는 하나는 저승에 가 황형(皇兄: 경종)의 얼굴을 뵙고자 함이요, 하나는 남면을 즐겨 하지 않는 마음을 성취하고자 함이다.(『영조실록』 25년 1월 22일)”


? 이튿날 비가 몹시 내리는 가운데 소동이 벌어졌다. 세자는 백관들과 빗줄기 속에서 울면서 명의 환수를 요청했다. 영조는 한참 후에 “대리청정(代理聽政)은 어떻겠는가?”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린 세자로 하여금 막연히 국사(國事)를 모르게 했다가 뒷날 만약 노론과 소론에 의해 그릇된다면 내가 비록 알더라도 어찌 능히 살아와서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오늘 이 거조는 뒷날에 반드시 효험이 없지 않을 것이다.(『영조실록』 25년 1월 23일)”


? 그 해 1월 27일 영조는 세자의 대리청정을 태묘(太廟: 종묘)에 고하고 팔도에 전교를 반포했다.? 사도세자는 열다섯의 나이에 정국의 한복판에 섰다.


? 영조는 재위 25년(1749) 2월 16일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에 나가 ‘오늘은 세자가 처음 정사를 보는 날’이라며 “품의하여 결정할 일이 있으면 세자에게 품의하라. 나는 앉아서 지켜보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사도세자의 정계 데뷔날이었다. 같은 해 4월에는 세자가 대신들에게 “민간의 질고(疾苦)에 대해 물어보았다”는 보고를 듣고는 “좋도다. 질문이여!”라고 칭찬했다.


? 그러나 세자가 집권 노론의 당익(黨益)에 손을 대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영조는 노론 당파성이 강하면서도 공정한 군주인 것처럼 평가받고 싶어했다. 영조는 재위 28년(1752) 경종 4년(1724) 사망한 소론 영수 최석항(崔錫恒)의 관직을 복직시켰다. 그러나 영조는 재위 31년(1755)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사건을 정치보복의 기회로 이용해 무려 500여 명의 소론 강경파(峻少)를 사형시켰다. 이때 사도세자가 온건론을 주창하면서 위험이 가중되었다. 영조는 경종 때 자신을 보호했던 소론온건파(緩少) 이광좌(李光佐)의 관작까지 삭탈했는데, 이는 살아남을 소론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광좌의 조카인 판중추부사 이종성(李宗城)이 과거 이광좌에 대해 “친척으로 따지면 상복을 입는 관계지만 의리로 따지면 사표(師表)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 인책할 정도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세자는 ‘경(卿)이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성상과 내가 환히 아는 일인데 이처럼 스스로 자책하는가’라면서 달랬으나 영조는 노론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종성의 관작을 삭탈했다.??


? 세자는 유배된 윤광찬, 전효증, 전효순 등을 국문해 죽이자는 대간의 청을 “따르지 않겠다(不從)”고 거절했고, 당대의 명필 이광사(李匡師)를 죽이자는 청도 거절했다. 두 사건 이듬해인 영조 32년(1756) 1월 관학(館學) 유생 유한사(兪漢師) 등이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의 정려(旌閭)를 요청한 것도 거부했다. 세자의 이런 정견 표출로 노론은 물론 부왕과도 사이가 불편해졌다. 영조는 재위 33년(1757) 11월 8일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와 우의정 신만(申晩)에게, 세자를 비난하고 나섰다.

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66세의 영조가 왕비로 맞아들인 15세의 정순왕후는 조선 후기 정국에 큰 파란을 몰고왔다. 사진가 권태균

수세에 몰린 세자를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만든 것이 영조의 재혼이었다. 영조는 재위 35년(1759) 6월 예순여섯의 나이로 세자보다도 열 살이나 어린 열다섯 정순왕후와 재혼했다. 정순왕후의 부친 김한구(金漢耉)와 아들 김귀주(金龜柱)는 국혼(國婚)을 계기로 벼슬길에 나서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다. 혜경궁 홍씨 가문과 정순왕후 가문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지만 세자 제거에는 뜻을 같이했다.


? 술을 마시지 않는 세자가 주정뱅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세자의 실제 모습은 소문과는 달리 성군의 모습이었다. 그러자 노론의 홍계희(洪啓禧) 등이 영조 38년(1762) 5월 22일 승부수를 던진 것이 나경언(羅景彦)을 시켜 고변한 것이다. 일개 상민(常民)이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고변한 희한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 그러나 형조참의 이해중(李海重)의 보고를 받은 영의정 홍봉한은 “청대(請對)하여 계품하지 않을 수 없다”고 영조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고, 이해중은 적군이라도 쳐들어온 듯 세 차례나 급히 청대했다. 경기감사 홍계희는 호위(護衛) 강화를 요청해 도성과 대궐의 문을 닫게 했다. 잘 짜인 각본이었다. 사도세자는 고변 이후 매일 시민당 뜰에 거적을 깔고 대죄했으나 장인인 영의정 홍봉한이 이 사실을 영조에게 보고한 것은 대죄 7일째인 5월 29일이었다. 영조는 “나는 그가 대명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답하면서도 늦은 보고를 질책하지도 않았다.


? 영조는 윤5월 13일 이십일째 대죄하고 있던 세자를 불러 자결을 명했는데 세자궁 관원들의 제지로 실패하자 뒤주 속에 가두었다. 세자는 음력 윤5월 중순의 뙤약볕 아래에서 여드레 동안 신음하다가 죽었다. ? 세자가 죽은 다음 달 소론 영수 조재호(趙載浩)가 “한쪽 사람들(一邊人:노론)이 모두 소조(小朝:세자)에게 불충하였으나 나는 동궁을 보호하고 있다”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 이 말이야말로 사도세자 사건의 본질을 잘 말해주고 있다. ? 소론의 정견을 갖고 있던 사도세자가 살해되고 소론 영수 조재호(趙載浩)가 그를 보호한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한 후 탕평책은 재만 남고 조정은 노론 일색으로 채워졌다.

홍봉한 초상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던 혜경궁의 부친 홍봉한은 세자 사후에 동정론으로 돌아서서 노론 벽파의 비판을 받았다.

? 사도세자 사후 조정은 크게 두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세자의 죽음을 동정하게 된 홍봉한 지지의 부홍파(扶洪派)와 홍봉한을 공격하는 공홍파(攻洪派)가 그것이다. 노론 벽파인 공홍파는 청명당과 정순왕후의 친정이 주요한 두 축이었다.? ? 홍씨, 김씨 두 외척 가문은 사도세자 제거에는 뜻을 같이했지만 세자가 사라진 빈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한 치의 양보 없이 치열하게 다투었다. 홍봉한을 공격한 진짜 이유는 홍봉한이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김귀주는 홍봉한을 사형시켜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 영조 47년(1771) 8월에는 유생 한유(韓鍮)가 홍봉한의 머리를 베라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중에 ‘홍봉한이 일물을 바쳤다(獻一物)’는 구절이 있었다. 일물(一物) 또는 목기(木器)는 세자가 죽은 뒤주를 뜻하는데 영조는 “저가 비록 ‘홍봉한이 바친 물건이라고 말하였으나 이미 바친 후에 이 물건을 쓴 사람은 어찌 내가 아니었던가? 천하 후세에서 장차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영조실록』 47년 8월 7일)”라고 말했다. 뒤주를 바친 인물이 홍봉한이란 사실을 인정한 말이었다. 탕평책을 붕괴시키고 아들마저 죽인 엽기적 정치 보복이 영조의 업보로 돌아오는 셈이었다. 더구나 세자를 죽인 거대한 정치 세력은 이제 그의 아들 세손(世孫: 정조)에게까지 향하고 있었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48호 2010년 1월 9일, 제149호 2010년 1월 16일, 150호 2010년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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