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이공계는 왜 손해봐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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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액정표시장치(LCD).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등 디스플레이가 수출의 효자로 급부상하고 있다.

사실 이 품목들은 일본이 오랫동안 막강한 기술력으로 세계를 제패하던 것인데, 몇 년 전부터 우리 전자업체들이 공격적인 투자와 과감한 기술개발을 통해 이제는 일본과 대등한 수준까지 발전했다.

이처럼 과감한 투자를 주도했던 한 회사의 임원에게, 무슨 자신이 있어 당시로서는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는 승부수를 던졌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임원의 대답은 "한국 기술자에 대한 신뢰였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기술자와 일본의 기술자를 비교해보니 한국의 엔지니어들이 우수해 축적된 노하우는 부족하지만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는 그럴 자신이 없어요. 우리 엔지니어의 수준이 자꾸 떨어져서…"라고 씁쓸히 덧붙이는 것이었다.

*** LCD.PDP 경쟁력은 어디서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 사회적 이슈가 된 지 상당한 시일이 지났지만 이처럼 상황은 호전되지 않고 있다. 그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어렵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고, 이에 따라 정부도 여러 대책을 세우고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대통령 과학장학생'을 선발해 우수한 학생들이 이공계 대학으로 진학할 경우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고, 과학기술자에 대한 포상제도를 확대해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새로 제정했으며, 정부 출연 연구소에 근무하는 연구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정년 후 연장 계약제'를 추진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대책들로 이공계 기피 현상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정책의 수혜 대상이 주로 아주 우수한 학생이나 연구개발에 종사하고 있는 전문직 과학기술자들로 한정돼 있어 실제로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능력있는 기술자들을 많이 양성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데에는 천재 연구자 양성보다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인재의 풀을 넓히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앞서 말한 한국 디스플레이 업계의 쾌거는 한두 사람의 스타 과학자가 이룬 것이 아니라 묵묵히 일하는 수많은 기술자가 노력한 결과다.

마찬가지로 천재 한 명이 수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예로 자주 언급되는 미국의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경우도 빌 게이츠라는 천재가 창업은 했지만 이 회사가 20년 넘게 세계적 지배력을 유지하는 힘은 그 뒤를 받쳐주는 2만3천명 가까운 기술개발 인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실 저변을 확대하는 일은 한두 명의 스타를 키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특히 이공계로 인재를 끌어모으려면 기술자로서의 삶이 의사나 변호사 못지 않은 보람과 보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불평등한 사회 제도에 의해 이공계가 손해를 보는 일이 많다.

예로써 기술사와 변리사 제도를 들 수 있다. 기술사는 전문분야의 설계, 감리 및 평가 등을 수행하는 최고급 기술인력이지만 지금은 기술사가 아닌 사람이 그 업무를 수행하더라도 막을 법적 장치가 없어 유명무실화 돼 있다. 특허를 취급하는 변리사도 변호사에 비해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다.

*** 소송대리인役도 못하는 변리사

변리사는 법령뿐 아니라 해당 분야 과학기술에 관해 전문적 지식을 갖춰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는 자동적으로 변리사가 될 수 있는 반면 변리사는 법에 규정돼 있는 소송대리인 역할조차 법원에서 인정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이처럼 이공계 전문가로서의 경험과 능력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막혀 있는데 장학금이나 포상을 미끼로 이공계 기피 현상을 해결한다는 발상은 공허할 뿐이다. 기여한 만큼 보상받는 사회 정의의 구현과 함께 국가 경쟁력도 높일 수 있도록 이공계에 불리한 제도 개선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吳世正 (서울대 교수, 물리학)

◇약력:미국 스탠퍼드대 물리학 박사,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및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역임. 현 복합다체계 물성연구센터 소장, 한국물리학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