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의 흔적, 부평 미쓰비시 ‘줄사택’ 존폐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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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 3일 오후 인천시 부평구 부영로 21-81 일대. 높은 빌라 건물 사이로 단층의 낡고 작은 집 90여 채가 다닥다닥 붙어있다. 콘크리트 벽은 칠이 벗겨진 채 일부 허물어져 있고 상당수 건물의 지붕은 내려앉았다. 문은 어른 한 명이 들어가기에도 비좁았다. 빈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13㎡ 정도 되는 작고 어두운 방이 보인다. 건물 한쪽에는 자물쇠로 채운 공용 화장실이 있다. ‘미쓰비시(三菱) 줄사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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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줄사택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일본 군수공장에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이 살던 합숙소다. 건물이 다닥다닥 줄지어 붙어있어 ‘줄사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흉물이 됐다. [사진 부평구]

이 줄사택의 보존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보기 흉하니 완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과 리모델링을 추진하는 구청이 맞선다. 또다른 한편에서는 줄사택 지역에 역사기록판을 설치해야 한다는 학계 전문가의 주장과 ‘주거공간을 관광 상품으로 만든다’는 거주민이 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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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줄사택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기계 제작회사인 히로나카상공이 노동자를 수용하기 위해 만든 합숙소다. 건물이 줄지어 붙어있어 줄사택이라 불렸다. 1942년 군수물자 보급창을 운영하던 미쓰비시 중공업이 인수했다. 당시 1000여 명의 한국인 근로자가 줄사택에서 생활했다. 광복 후 일본이 물러난 후에도 상당수 근로자가 줄사택에 살았다. 낡았지만 임대료가 싸 1950~60년대에는 가난한 음악인들이 집중적으로 살기도 했다. 줄사택은 당초 1000여 채 규모였지만 지금은 87채만 남아있다. 이 가운데 50여 채는 빈집이다. 나머지 37채에 홀몸노인과 기초생활수급자 등 40여 명(주민등록상으로는 70여 명)이 살고 있다. 자가 소유 또는 임대 형태다.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 노동자 숙소
당초 1000여채, 이젠 87채만 남아
“안내판 세우고 보존” 학계 주장에
주민들 “관광지화 안돼” “당장 철거”
부평구는 45억 들여 리모델링 추진

줄사택은 낡은 외관 등으로 도심 흉물이 되면서 인근 주민들은 “당장 철거하고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화재 발생 위험이 큰데다 지역 슬럼화로 피해가 크니 철거하자는 것이다. 부평구는 2018년까지 45억원을 들여 미쓰비시 줄사택의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새뜰마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람이 살고있는 주택은 리모델링하고 일부 빈집 등은 철거해 공동 화장실이나 빨래방, 공동작업장 등으로 만드는 사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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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인사를 중심으로 “줄사택의 역사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 연구팀은 최근 “미쓰비시 줄사택 앞에 안내판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강제징용의 역사를 후대에 알려야 한다는 것이 서 교수 측 주장이다.

줄사택에 사는 주민은 “사람이 사는 곳을 관광지로 만든다”며 반대하고 있다. 줄사택에서 20년 살았다는 한 주민은 “하루에도 몇 번씩 사진기를 든 사람들이 찾아와 집 주변을 찍는 통에 생활이 안 될 정도”라며 “안내판까지 생기면 그런 일이 더 늘어날 것 아니냐”고 했다. 실제 줄사택은 언론에 소개된 후 방문객이 늘면서 주민들이 생활에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 교수 측은 지난달 30일 설명회를 열고 취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전체 주민 중 12명 만 참여한데다 찬반이 엇갈려 결론을 내지 못했다.

김정훈 부평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취지는 좋지만 주민들과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되면서 반발을 사게 된 것 같다”며 “아직 사택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부평역사박물관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부평 지역 역사 기록 작업을 하고 있는데, 줄사택 주민들의 반발로 부평2동의 다른 지역부터 연구에 착수하기로 했다.

서경덕 교수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주민들에게 ‘역사성 보존 등을 위해 안내판 설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계속 알리고 설득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최모란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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