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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이민호, 애니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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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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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요즘 중국에서 ‘송중기 앓이’가 극심하다지만 쿠바에선 ‘이민호 열풍’이 대단하다. 지난주 쿠바에 다녀온 한 문화기획자의 전언이다. 송중기가 ‘태양의 후예’로 중국을 흔들었다면, 이민호는 ‘상속자들’로 쿠바를 사로잡았다. ‘상속자들’은 3년 전 방영됐다. ‘태양의 후예’와 마찬가지로 스타작가 김은숙의 손을 거쳤다. 철 지난 드라마가 왜 쿠바에서 떴을까.

지인의 설명은 이랬다. “DVD 복제로 유통된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만나는 사람마다 ‘다음에 이민호를 꼭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방문 때보다 더 많은 경호원이 필요할지도, 롤링스톤스 공연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릴지 모른다고 한다.” 과장이 섞인 것 같다. 쿠바와 단절된 외교를 54년 만에 이은 오바마요, 무려 60만 관객을 불러들인 롤링스톤스 아닌가.

상황을 들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예전 쿠바에선 ‘텔레노벨라’로 불리는 브라질 연속극이 유행했다. 상류층의 사랑과 불륜, 음모와 배신을 버무린 통속극이다. 보통 6개월가량 방영된다. 반면 한국 드라마는 가족·연인의 보편적 사랑을 아기자기하게 다루고 전개도 빠르다. 남성 주인공은 여성에게 헌신적인 ‘젠틀맨’이라 남녀평등을 앞세우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되레 매력적이라는 분석이다. 이민호의 경우 영화 ‘강남 1970’,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인기도 높다고 한다.

쿠바는 라틴아메리카 33개국 중 한국의 유일한 미수교국이다. 북한과는 1960년 외교관계를 텄다. 요즘에는 한국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2005년 수도 아바나에 KOTRA 무역관을 개설했고, 기업들의 진출도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한국인 7000여 명이 쿠바를 찾았고 올해에는 1만5000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1921년 멕시코에서 건너온 한국인 300여 명이 사탕수수 농장에 처음 정착했던 것에 비하면 상전벽해(桑田碧海)다.

‘애니깽’으로 불린 이민 1세대는 혹독한 노동 조건에서도 조국 독립을 도왔다. 매달 월급의 5%를 지원금으로 뗐고, 끼니 때마다 한 숟가락씩 쌀을 덜었다. 하지만 현재 그들을 기억하는 시설은 아바나 서쪽 100㎞ 정도 떨어진 마탄사스 산간 지역에 있는 초라한 위령비 하나. 그것도 미국 시애틀 교민이 세운 것이다. 이역만리 선조들이 흘린 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마침 멕시코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애니깽의 아픔과 눈물을 언급했다. 공치사가 아니길 바란다. 우리의 선택이 분명해 보이는 오늘이다.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