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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38)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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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호 1 면

박문수 초상 흔히 뛰어난 암행어사로 알려진 박문수는 이인좌의 봉기 토벌에 가담한 소론 온건파로서 고른 인재 등용과 군역제도 개혁에 앞장섰던 개혁정치가였다.

선왕독살설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영조는 훨씬 성공한 군주가 될 자질이 있었다. 그는 절검을 솔선하는 애민군주였다. 재위 20년(1744) 5월 영조가 병이 들어 약원(藥院)의 진찰을 받을 때 신하들은 영조의 침실을 엿볼 수 있었다.?


“이때 임금은 목면으로 만든 침의(寢衣:잠옷)를 입었으며…이불 하나 요 하나도 모두 명주로 만든 것이었으며 병장(屛障:병풍)도 진설하지 않았다. 또 기완(器玩)도 없어서…여항(閭巷:민간)의 호귀(豪貴)한 집에 견주어도 도리어 그만 못했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 나와 검소한 덕에 대해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영조실록』20년 5월 2일)”?


영조의 침실이 민간의 부잣집만도 못했다는 이야기다. ‘영조행장’에도 “중의(中衣)·철릭(貼裏:군복) 따위는 이따금 빨고 기워 입고 겨울에 매우 춥더라도 갖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영조는 절검을 솔선함으로써 사대부들의 사치를 금지시키려 했다. 흉년과 전염병이 만연해 백성들이 죽어가는 가운데에서도 사대부들의 사치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재위 8~9년 가뭄과 전염병이 창궐하는 가운데 영조는 “필서(匹庶:서인)의 사치는 곧 조사(朝士:벼슬아치)를 본받은 것이고, 조사의 사치는 곧 귀척(貴戚:왕실의 외척)을 본받은 것이며, 귀척의 사치는 왕공(王公)에 근본을 두고 있다(『영조실록』 9년 12월 22일)”면서 왕실의 고급 비단 직조를 금지시켰다. 영조는 재위 32년(1756) 1월 사대부가(家) 부녀자들의 가체(加<9AE2>:어여머리)를 금지시키고 족두리(簇頭里)로 대신하도록 명했다. 『영조실록』은 이때 사대부가 부인들이 ‘서로 높고 큰 가체를 자랑하고 숭상했다’면서 “한번 가체를 하는 데 몇 백 금(金)을 썼다”고 전하고 있다. 영조는 금주령도 자주 내렸는데, 심지어 “갑자기 좋은 계책이 생각났으니 바로 예주(醴酒:식혜)인데, 아! 예주가 어찌 현주(玄酒:제사 때 술 대신 쓰는 맑은 찬물)보다 낫지 않겠는가?(『영조실록』 31년 9월 7일)”라면서 제사 때도 술 대신 식혜를 쓰라고 명했다. 영조부터 금주했음은 물론이다.?


소론의 정견을 갖고 있던 사도세자가 살해되고 소론 영수 조재호(趙載浩)가 그를 보호한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한 후 탕평책은 재만 남고 조정은 노론 일색으로 채워졌다. 영조 48년(1772) 3월 이조판서 정존겸(鄭存謙)과 이조참의 이명식(李命植)이 성균관 대사성 후보 세 명을 모두 노론 청명당(淸名黨)으로 주의(注擬: 후보로 의망함)한 사건은 노론 일당의 정치지형이 낳은 부산물이었다.?


청명당 사건으로 공홍파의 한 축이 무너지자 조급함을 느낀 김귀주가 영조 48년(1772) 7월 홍봉한을 강력히 공격하며 일으킨 것이 ‘나삼(羅蔘)·송다(松茶) 사건’이었다.? “연전에 재상 홍봉한이 외방(外方: 지방)에서 구매하던 삼(蔘)을 경공(京貢: 서울 공인들이 납품하는 것)으로 바꾸었는데 공인배(貢人輩)들이 실처럼 가는 미삼(尾蔘)을 모아 풀로 붙여 삼이란 이름으로 내국(內局: 내의원)에 바쳤습니다. 혹 내국에서 퇴짜를 놓으려고 하면 홍봉한이 큰 소리로 ‘이는 나를 죽이려는 것이다’라고 꾸짖어 위로는 제거(提擧: 내의원 책임자)에서부터 아래로는 의관까지 마음으로는 잘못인 줄 알면서도 입으로 감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영조실록』 48년 7월 21일).”?

순무영진도 조선 후기 군사들의 군진 모습을 그린 것이다. 조선은 양반 사대부는 군역 의무가 없고 가난한 양인들만 군역 의무가 있는 모순된 군역 제도를 갖고 있었다. 사진가 권태균

홍봉한이 지방의 인삼 구매선을 서울의 공인들로 바꾸면서 이들과 짜고 싸구려 인삼을 납품했다는 비난이었다. 김귀주는 영조가 6년 전인 재위 42년(1766) 병석에 누웠을 때 자신의 부친 김한구는 좋은 나삼(羅蔘)을 쓰려 했으나 홍봉한이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주장했다. 3년 전(영조 45년)에 사망한 부친 김한구가 생전에 자신에게 말했다는 것이 근거였다. 홍봉한이 ‘나삼은 조달하기 어렵다’고 말하자 부친(김한구)이 ‘일단 약원(藥院: 내의원)에 있는 나삼을 쓰면서 각도에 나삼을 바치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으나, 홍봉한이 ‘대감은 척리(戚里: 외척)로서 어찌 약원의 일에 간섭을 하시오?’라고 발끈 성을 냈다는 것이었다. 김귀주는 김한구가 동삼(童蔘) 한 뿌리를 구해 달여 올리자 영조의 병이 나아서 “부자가 서로 마주하여 춤을 출 듯이 기뻐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영조의 다리가 아파 고생할 때 전 참의 홍성(洪晟)의 노부(老父)가 송다(松茶)를 마시고 효험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홍봉한에게 송다를 올리라고 권했으나 모른 체했다고 주장했다. 김귀주는 김한구가 이 일을 말할 때면 “가슴을 어루만지고 눈물을 참으려 했으나 감추지 못했다”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 영조가 아플 때 김귀주의 부친 김한구는 정성을 다한 충신이지만 홍봉한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두 외척 가문이 정국의 중심에 서자 나삼(羅蔘)·미삼(尾蔘) 같은 저급한 이야기들이 정쟁의 소재가 된 것이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45호 2009년 12월 19일, 제150호 2010년 1월 14일


http://sunday.joins.com/archives/42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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