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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알파고와 자상한 노교수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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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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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신경외과학교실

암환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간의 암 퇴치를 위한 많은 노력이 무색하다. 암은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예방과 치료에 어느 정도 발전이 있었지만 완치가 힘들기 때문이다. 암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가 다른 장기로의 전이다. 뇌에도 암이 전이된다. 암이 뇌까지 전이되면 환자는 눈앞이 캄캄해진다.

폐암이나 유방암환자가 신경외과 의사와 마주 앉는다. 뇌로 암이 전이됐다는 말에 환자는 풀이 죽어 있다. 안 좋은 상황을 짐작은 하지만 그래도 신경외과 의사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최선을 다해 보자는 의견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어 본다.

전이성 뇌종양의 치료에도 진전이 있었다. 최신 치료법을 동원하면 뇌종양으로 인한 장애를 완화할 수 있다. 또한 상당수에서 전이성 뇌종양으로 인한 사망을 막을 수 있다. 전이성 뇌종양은 병변이 여러 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발이나 경과 중 새로운 병변이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상태에 따른 적절한 치료법의 선택이 중요하다. 치료법으로 개두술, 항암제 투여, 전뇌 방사선 치료 또는 방사선 수술이 있다.

두개골을 여는 개두술은 확실한 종양 제거 수단이다. 하지만 병변이 다발성인 경우 여러 곳을 수술하기 쉽지 않다. 뇌 수술이 몸과 마음이 쇠약해진 환자에게 주는 부담 또한 작다고 할 수 없다.

암세포를 효과적으로 박멸하는 항암제가 많이 개발돼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항암제는 뇌조직을 잘 침투하지 못한다. 전뇌 방사선 치료는 병변이 여러 개인 경우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뇌 전체에 방사선이 조사되기 때문에 인지기능 저하가 걸림돌이다.

비교적 최근에 개발된 방법이 방사선 수술이다.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 종이를 태우듯 방사선으로 종양세포만 선택적으로 죽이는 방법이다. 병변의 수가 많지 않다면 최적의 치료법이라 할 수 있다.

외래진료실에서 50대 중반의 환자를 만났다. 약 2년 전 폐암으로 수술과 방사선 및 항암 치료를 받았다. 치료가 잘돼 정상 생활을 하며 지냈다. 어느 날 갑자기 발작이 일어났다. 자기공명영상촬영(MRI)을 해 보니 10개가 훨씬 넘는 전이성 뇌종양이 발견됐다. 병변의 수가 많아 전뇌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방사선 치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약 10개월 뒤 말과 젓가락질이 어둔해졌다. 환자가 신경외과로 안내됐다. MRI 소견에서 커진 병변도, 없어진 병변도, 새로 생긴 병변도 있었다. 모두 11개였다. 그중에서 좌측 전뇌부의 병변이 커져 증상이 발현된 것이다. 길어도 한 달을 넘기기 힘들어 보였다.

남은 방법은 방사선 수술뿐이다. 경험상 해 볼 만했다.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하지만 10개 이상의 병변은 방사선 수술을 할 수 없었다. 10개 이상의 병변에 방사선 수술이 효과적이라는 객관적 근거가 미약하다는 건강보험 규정 때문이다. 규정을 무시하고 치료하면 보험급여가 삭감되고 의사는 경고장을 받는다.

사람 목숨과 규정 준수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정답은 자명했다. 환자는 방사선 수술을 받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 지난달 내내 알파고 열풍이 대단했다. 인공지능의 위력에 모두가 놀랐다. 제2의 산업혁명이라는 기대감과 인류 재앙이라는 공포심이 공존했다.

인공지능의 다음 타깃은 의료 부문이라고 한다. 시간문제이지 인공지능 의료는 조만간 현실이 될 것이다. 차가운 기계 앞에 몸을 맡기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진단과 치료방침을 제시한다. 방대한 자료에 근거한 것이니 오진의 우려가 적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인공지능 의사선생님은 생명과 규정 중 어떤 것을 선택할까. 기계에 법규 위반의 권리를 주지는 않을 것 같다. 승과 패만 있는 바둑과는 달리 의료는 철학과 윤리 문제가 선결돼야 한다.

추운 겨울 청진기 끝을 손에 꼭 쥐고 회진하시던 옛 노교수님 얼굴이 눈에 선하다. 금속의 차가운 청진기가 몸에 닿을 때 움찔할지 모를 환자를 위해서다. 호랑이 같은 교수님의 뜻밖의 모습에 혼자 미소 지었던 생각이 난다.

인공지능이 따뜻한 진료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기우이기 바란다.

김동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신경외과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