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인공지능 시대 법률가 가장 먼저 사라질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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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보편화되는) ‘제4차 산업혁명’ 때는 법률가가 가장 먼저 사라질 수 있다. (살아남으려면) 사법부도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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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대법원장이 이달 3~14일 사이 네 차례로 나눠 일선 판사, 중견 판사 등 432명(전체 판사 2800여 명의 15%)을 대상으로 특별강연을 했다. 이 과정에서 이런 발언을 공통적으로 한 것으로 29일 확인됐다. 한 판사는 “사법연수원에서 열린 집중 특강에서 마치 법관들에게 화두를 던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네 차례 판사 대상 특강서 거듭 강조
“관행 너무 의존 말고 창의성 발휘
사회 지탱하는 사법부 고민해야”

강연을 들은 판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양 대법원장은 특강마다 올해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의 화두였던 ‘4차 산업혁명’을 공통적으로 언급했다. 포럼에서 인공지능, 로봇 등이 보편화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판사 등 법률 관련 종사자는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직업군’으로 분류됐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다.

양 대법원장은 “4차 산업혁명이 오면 법률가 기능이 소멸될 우려가 있다. 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해 사법부가 헌법이 부여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창의적·창조적으로 가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또 “과거 관행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사법이 사회를 어떻게 지탱할 것인지 근본적 질문, 진지한 고민을 해 달라” “사회 변화에 무조건 따라가는 것은 문제지만 지속적인 사회 발전을 도외시하고 관행만 중시할 경우 법원의 신뢰도가 하락할 우려가 있다”는 우려성 지적도 했다.

특강에선 일반 국민에게 비쳐지는 사법부의 신뢰 문제도 비중 있게 다뤄졌다. 양 대법원장은 우리 사법부가 세계은행의 ‘기업환경평가’상 법적 분쟁 해결 부문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도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OECD 설문조사에서는 법원의 신뢰도가 낮게 나타나는 것을 우려했다. 이어 그는 “실제와 국민 인식에 괴리가 왜 생기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자성을 촉구했다는 것이다.

양 대법원장은 또 “법원이 다른 국가기관보다 신뢰도가 낮게 나오는 것을 방치하면 명예로운 법원이 되지 못한다” “일선 재판은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인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법관은 각자가 하나의 법원이자 대표자라는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는 등의 발언도 했다.

양 대법원장의 특강은 프로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고 간 ‘세기의 대결’이 한창 전개되던 때에 이뤄졌다.

지난 3일 형사재판 실무연수 대상자 266명을 대상으로 첫 특강이 진행됐다. 이어 초임 합의부 재판장 46명을 대상으로 한 특강이 열린 9일엔 인간 대 인공지능 간 1국이 열렸다. 2국이 열리고 하루 뒤인 11일 초임 항소심 재판장 46명을 대상으로 특강이 있었고 13일 초임 단독 재판장 98명을 대상으로 한 특강이 있던 날 벌어진 4국에선 이세돌 구단이 첫 승을 거머쥐기도 했다.

양 대법원장이 이처럼 판사들 속으로 들어간 건 지난해 역점 사업으로 추진했다가 좌절된 상고법원 도입 문제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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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대법원장이 강력하게 상고법원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내부 불만이 불거졌고 이에 올해 초반부터 ‘집안 식구 챙기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지난 연말과 비교할 때 대법원 법원행정처 차원의 상고법원 이야기가 확연히 줄었다”고 말했다.

대법원이 지난달 사법행정위원회 신설 규칙을 만든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일반 법관들이 근무 환경이나 처우 개선, 재판부 운영 방식 등 주요 사법정책의 수립 전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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