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중수준 못 미치는 후보자들|문병호 사회부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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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좀체 깨뜨려지기 어려울 것만 같던 시민들의 정치불감증이 불과 며칠동안의 유세과정을 통해 극적인 변화를 나타내고있다.
전국 곳곳의 유세장마다 추위에 아랑곳없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룬 청중들. 「젊은 유권자」들이 더 많아진 이들 청중들이 각 당 후보의 정견공방에 경청이상의 열띤 반응을 보이고 있는 현상은 예상을 벗어난 놀라움이다.
그 동안 「무관심」으로 읽혀졌던 시민들의 무표정과 냉소는 사실은 자율의 상황이었을뿐 내심에선 참여에의 갈망을 농축시켜왔던 것으로 믿어진다.
침묵속에 농축된 이 참여에의 갈망이 오랜만의 선거에서 큰 제약 없이 표출돼 극적인 변화로 느껴지고 있을 따름이라고 보아야 할것 같다.
4일 하오 서울청구국교운동장에서 있었던 「정치1번지」 종로-중구 합동유세장 풍경은 그 같은 시민들의 정치관심·참여에의 열망이 폭발하는 대표적 현장이었다.
눈이 녹아 진창이 된 운동장을 꽉 메운 2만여 청중은 7명 후보들의 연설을 시종 진지한 자세로 들으며 대목마다 박수와 환호, 때로는 야유로 뜨겁게 반응했다.
각당 후보들이 동원한 박수부대들의 극성스런 응원전으로 후보연설이 몇 차례 중단되기도 해 분위기를 흐렸으나 의젓한 청중들이 끝까지 분위기를 이끌었다.
청중들은 박수부대의 눈에 거슬리는 응원전조차 관용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필요한 대목마다 적절한 반응으로 분위기의 일탈을 견제하는 성숙된 의식을 보였다.
오히려 눈에 확연한 것은 후보와 진행 측의 미숙이었다.
유세에서 드러내진 후보들의 의식, 정치적 식견, 그 식견을 전달하는 대중연설의 기술은 청중의 높아진 의식수준에 비길 때 한참 아래로 보였다.
『무슨 저런 소리를 하고 있어.』 허술한 차림의 중년조차 뒷전에서 후보의 일방적인 논리에 비웃음을 보였다.
후보들은 안정과 민주회복으로 여야가 맞섰으나 지극히 초보적인 원칙의 주장에 그쳤을뿐 청중들을 공감하게 하는 정연한 논리나 원대한 비전은 제시되지 않았다.
해방 후 40년의 대의정처연륜에도 후보들의 연설은 때로 어순이 맞지 않고 논리가 헛갈리는 등 「기술」의 차원에서도 수준이 낮았다.
말의 아름다움과 힘을 극대화하는 웅변은 과연 우리 정치인들에게서는 아직 기대하기 어려운 것일까.
6·25 전시 하에서도 선거를 치르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우리 유권자, 청중의 수준이 대학생이라면 우리 정치인들의 의식·기술수준은 중학생의 차원이 아닌가 싶었다.
규제와 단절의 정치문화가 빚은 비극은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개선돼야만 한다.
아쉬움 속에 유세가 끝나고 그래도 「정치」 에 굶주렸던 시민들은 다소간 갈증이 풀린 홀가분한 표정으로 흩어졌다.
두 사람의 청중과 한 택시를 탔다.
『솔직히 실망했어요. 그러나 결국 그중 나은 사람을 선택해야지요.』
올해 처음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여대3년생은 연3일 유세장을 쫓아다닌 결론을 이렇게 말했다.
『두고 보십시오. 이번 선거는 좀 다를 겁니다. 젊은 사람들이 과반수를 훨씬 넘어섰어요. 이들이 이제 선거의 판도를 좌우합니다』
청파동에 산다는 40대가 여대생 유권자의 말을 받았다. 「그 나라의 정치는 그 나라 국민의 수준」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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