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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국회에 가로막힌 역외탈세 단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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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하남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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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현
경제부문 기자

“단순한 회의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홍콩은 역외탈세 근절을 위한 핵심 지역입니다.”

임환수 국세청장은 지난 16일 홍콩에서 웡 큔파이 홍콩 국세청장과 만나 역외탈세에 적극 공조하기로 했다. 국세청은 같은 날 보도자료를 통해 이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언론을 비롯한 세간의 큰 관심을 얻지는 못했다. 답답했는지 국세청 관계자가 전화를 걸어 이 회의가 가진 의미를 열심히 설명했다. 홍콩 지역에서 세금 탈루 의심 회사를 발견해도 법적 근거가 없어 자료 확보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홍콩은 2014년 말 기준 국내 법인의 해외금융계좌 신고액이 8조1243억원으로 가장 많은 지역이다. 게다가 지난해 국제 비정부기구인 조세정의네트워크(TNJ) 발표에 따르면 홍콩은 미국·스위스에 이어 역외 조세 도피를 조장하는 3대 국가로 지목됐다. 그만큼 국세청으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곳이다. 홍콩에 숨어 있는 탈세 기업을 본격적으로 손볼 권한을 가진다면 국세청으로서는 역외탈세 방지를 위한 큰 무기를 쥘 수 있다.

사실 이 문제를 두고 홍콩과 뜻을 맞춘 지는 오래됐다. 양국은 2014년 7월 금융·재무 정보 교환을 위한 한·홍콩 조세조약에 정식 서명하고 국회 비준 절차만 남겨두고 있다. 홍콩 국회는 이미 2014년 12월에 비준을 끝냈다. 발효를 가로막는 건 다름 아닌 한국 국회다. 지난해 4월 국회에 상정된 비준안은 1년 가까이 방치되고 있다. 다음달 총선까지 겹친 통에 언제 국회 문턱을 넘을지 기약조차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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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익숙한 광경이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노동개혁법처럼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경제 법안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그나마 이런 법안은 찬반 논쟁이라도 있다. 한·홍콩 조세조약은 그런 것도 아니다. 역외탈세를 막겠다는 비준안에 대한 반대 목소리도 딱히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정부는 더 답답하다. “반대 측이 있으면 찾아가 설득이라도 할 텐데 그런 것도 아니다”는 게 익명을 원한 정부 관계자의 토로다.

역외탈세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나라 곳간 사정이 녹록지 않은 가운데 세원 확보를 위한 역외탈세 근절은 시급하다. 게다가 역외탈세는 공평과세를 비웃는 행위다. 조세정의 확립 차원에서도 반드시 도려내야 할 환부(患部)다. 그래서 국세청은 최근 ‘역외탈세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지난 1월에는 이례적으로 역외탈세 혐의가 있는 법인과 개인 30명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역외탈세자의 자진 신고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이런 와중에 국회가 제 할 일을 하지 않아 전쟁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세금을 빼돌리는 탈세자만큼이나 일 안 하는 국회가 초래하는 폐해가 깊고도 커 보인다.

하남현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