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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전통 갈아엎는 대한민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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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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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논설위원

2000년대 한류 열풍이 불자 대만 정부는 한국을 벤치마킹해 ‘타이완 붐’을 일으키는 방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쉽지 않다”고 결론 내린다. “토착 풍습에다 본토에서 건너온 중국 문화가 뒤섞여 대만 고유의 전통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게 대만 관계자의 토로였다. 확연히 차별화된 전통 없이는 한류도 타이완 붐도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한류의 큰 덩어리는 우리 고유의 전통이 밑천이다. 대장금이 그랬고 요즘 뜨는 K푸드도 한식의 전통 없이는 불가능하다. 유구한 전통이야말로 우리의 경쟁력이자 미래의 먹거리인 셈이다.

그런데도 요즘 우리 사회는 전통을 지키고 다듬기는커녕 갈아엎는 데 골몰한다는 느낌이다. 최근 발표된 정부 상징 교체사업이 딱 그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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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당국은 67년간 써 온 무궁화 모양의 ‘정부 상징(GI)’을 태극 문양으로 바꾼다고 밝혔다. 제각각이던 ‘정부부처·기관별 상징(MI)’도 여기에 맞추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적잖은 문제가 있다. 우선 이 같은 방침은 여론과 어긋난다. 지난해 정부 조사 결과 “현 문양을 유지하자”가 26.3%, “현 문양을 개선하자”가 39.6%였고 “새 마크를 개발하자”는 34.1%에 불과했다. 현 문양 개선이 가장 많았던 셈이다.

게다가 정부 상징을 태극으로 고쳐도 위 단계인 ‘나라 문장’은 여전히 무궁화 모양이다. 국회와 법원 상징 역시 꽃 모양으로 남는다. 국가와 3부(입법·사법·행정) 상징 간 통일성마저 깨질 판이다.

미국·영국·독일 등 정부 상징을 효과적으로 쓰는 나라엔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오래된 전통 문양을 살려 왔다는 거다. 영국은 17세기 이후 4등분된 방패 문양을,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상징인 독수리를 계속 써 왔다. 부처별 로고 사용이 자유롭다는 미국에서도 흰머리수리 문양이 많은 기관에서 애용된다. 국가·정부 상징을 고치더라도 핵심 부분은 건드려선 안 된다. 그래야 정체성 혼란이 없다.

당국은 그럼에도 무궁화 문양의 정부 상징을 태극으로 바꾸려 한다. 이를 위해 편성된 올 예산만 76억원이다. 멀리 못 보는 정책 탓에 정부 조직이 개편됐던 2008년에는 16개, 2013년에는 13개 부처 상징이 바뀌었다. 당명이든, 정부 상징이든 하루아침에 깡그리 없애는 일은 관두자.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소중한 전통이 쌓이겠는가.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