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인공지능(AI) 알파고와 세기의 대국을 마친 이세돌 9단은 16일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다섯 차례 대국에서 초읽기를 맡아 이 9단을 가까이서 지켜본 계시원 정유정(22·명지대 바둑학과 2학년)씨로부터 대국장 안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국장 계시원이 본 세기의 대결
평소 대국 때 상대 노려보던 이 9단
알파고와 대결 땐 가끔 허공만 응시
계시원 경력 7년째인 정씨는 “이세돌 사범님의 대국을 계시한 적이 많아 스타일을 잘 아는데 이번에는 평소와 많이 달랐다”고 했다.
- 뭐가 달랐나.
- “유난히 혼잣말을 많이 하고 놀라거나 화난 표정을 자주 지었다. 돌을 놓고 고개를 갸웃하며 ‘이상한가’ ‘실수했나’ 하고, 알파고가 강한 수를 두면 ‘까시다(가시처럼 어려운 수라는 뜻의 바둑용어)’ ‘아이고’ ‘참’이란 혼잣말을 했다.”
- 대국마다 달라진 점이 있나.
- “첫날은 즐기는 모습이었다. 알파고를 테스트하는 듯했다. 알파고의 수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도 지었다. 2국부터는 훨씬 진지해졌다. 3국은 목숨 걸고 두는 느낌? 마치 조치훈 사범님의 모습을 보는 거 같았다. 첫날에는 진 게 충격인 거 같았는데 2국부터는 패배를 받아들이는 표정이었다. 리액션도 점점 작아졌다.”
- 처음 승리한 4국은 어땠나.
- “4국도 3국이랑 비슷했다. 마지막처럼 목숨 걸고 두는 거 같았다. 이기고 나서야 1~4국 내내 굳어 있었던 표정이 풀어졌다. 5국에서는 가장 마음의 부담을 덜고 편안하게 두는 것처럼 보였다. 다섯 판 중에서 제일 침착하고 차분해 보였다. 하지만 지고 나서 가장 힘들어했다.”
- 대국장을 자주 나갔나.
- “사범님이 원래 대국장을 자주 나가고, 화장실도 느긋하게 다녀오는 편인데 이번에는 한 대국에 두 번 정도 나갔다 왔다. 엄청 줄어든 거다. 화장실이 복도 끝에 멀리 있어서 황급하게 다녀오는 느낌이었다. 시간을 아끼려 그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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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자황 6단은 어땠나.
- “알파고 같았다. 3국에 처음 물 한 모금마셨다. 5국 내내 화장실도 안 가고 표정의 흔들림도 없었다. 아, 아자황 6단이 대국 전 분장팀에 메이크업 좀 해달라고 할 때 사람 같았다(웃음). 사범님은 메이크업 안 한다고 했다. 또 아자황 6단이 내내 차분하게 돌을 놓다가 알파고가 강수를 두면 돌을 세게 놓더라. 저절로 바둑의 흐름에 빠진 것 같더라.”
- 지켜보면서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 "보통 사범님이 돌을 놓고 상대를 노려보면 그 눈초리에 상대는 살 떨린다. 사범님의 다른 대국에서는 기세 싸움이 관전의 묘미인데 상대가 기계니 그런 걸 못했다. 그래선지 아자황 6단은 쳐다보지도 않고 바둑판만 보고 두더라. 가끔 먼 산 보고, 한숨 쉬고, 바둑 두고 그랬다. 이세돌 9단만의 승부 호흡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