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박9일 170여 시간 이어진 발언…협상의 정치는 멈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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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1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참석해 있다. 이날 더불어민주당은 의원총회에서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해 진행했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중단을 결정했다. [사진 강정현 기자]

야권의 필리버스터가 172시간(1일 오후 11시 현재)을 돌파했다. 세계최고기록(종전 캐나다 새민주당의 58시간)이다.

더민주 필리버스터, 입법 마비

 더불어민주당은 1일 오전 중 이종걸 원내대표가 마지막 주자로 나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끝내려 했지만 정의당 의원들이 시간을 끌면서 2일까지 토론이 계속됐다. 하지만 더민주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테러방지법안·선거법개정안·북한인권법안 등을 처리한다는 입장은 분명히 했다.

 ◆정의화 자리에 앉은 김춘진=필리버스터가 시작된 지난달 23일 오후 7시6분 이후 국회 의장석엔 더민주 소속 김춘진 보건복지위원장, 박병석 전 부의장 등도 앉았다. 상임위원장이 국회 의장석에 앉은 건 헌정 사상 처음이다.

의원들은 그간 36명(오후 11시 현재)이 돌아가면서 필리버스터에 나섰지만 의장단은 3명뿐이다. 그러다 보니 체력이 먼저 동 난 쪽이 의장단이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1일 오후 11시 현재 51시간50분간 사회를 봤다. 정갑윤·이석현 부의장은 사무실에 라꾸라꾸(접이식 침대)까지 들여놓고 쪽잠을 자며 버텼다.

 필리버스터를 기록하느라 동원된 국회속기사는 65명이었다. 이들은 2인 1조로 24시간 내내 의원들 발언을 받아 적었다.

국회 의정기록과 관계자는 “1일 오전까지 작성된 회의록은 1300페이지 분량”이라고 말했다. 2월 4일 제339회 국회 본희의 회의록(74페이지)의 17배였다. 10시간18분을 발언한 은수미 의원의 회의록만 80페이지로 본회의 전체 분량을 넘었다.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 의원들이야 돌아가면서 ‘선거유세’ 하고 쉬면 그만이지만 속기사, 국회직원은 철야근무로 파김치”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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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암 엇갈린 필리버스터 의원=필리버스터 와중에 국회방송에 시청자가 몰리고 페이스북 등에 실시간 중계창이 떴다.

김광진·은수미·정청래 의원 등은 인터넷에서 검색어 1위에 올랐다. 은 의원에겐 후원금이 몰려 입금액이 통장 8개 분량에 달했다고 한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은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긴 연설문을, 최민희 의원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장시간 읽었다. 이학영 의원은 김남주 시인의 ‘진혼곡’을 낭독했다.

 ‘필리버스터 괴담’도 돌았다. 필리버스터 신청 의원 중 공천 탈락 의원이 속출해서였다. 김현·임수경·전정희 의원은 공천배제(컷오프)를, 강기정 의원은 전략공천(공천 탈락)을 통보받았다.

강 의원은 필리버스터 도중 “이렇게 자유롭게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면 내가 폭력 의원으로 낙인찍히지 않았을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강 의원은 새누리당 의원들과 수차례 몸싸움을 벌인 전력이 있다.

의제와 벗어나는 발언을 하면 새누리당 의석에선 “말 같은 얘기를 해야지” “그런다고 공천 받을 줄 알아?”라는 고함이 나왔으나 이때만큼은 조용했다. 이석현 부의장은 강 의원에게 “뒤에서 보니 고독해 보인다. 용기 잃지 마라”고 위로했다.

 ◆원유철의 뚝심=더민주는 필리버스터를 진행하면서 새누리당과 테러방지법안 수정을 위한 협상을 계속한다는 전략이었지만 새누리당 원 원내대표는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고 버텼다. 필리버스터 하고 싶은 만큼 해보란 식이었다.

박영선 의원은 1일 필리버스터 중 “이걸 끝내면 정의화 의장이 직권상정을 해서 이 법을 통과시킨다. 그런데도 저희가 중단하는 것은 총선에서 이기려고 그러는 것”이라며 눈물을 쏟았다.

 국면이 치킨게임 양상으로 흐르면서 여야 공방도 치열했다. 신경민 의원은 새누리당 공약집을 들고나와 “새누리당이 야권을 비난하지만 필리버스터는 새누리당의 공약이었다”고 폭로했다. 이를 생중계로 지켜보던 네티즌이 새누리당 인터넷 홈페이지에 한꺼번에 들어가 홈페이지가 다운된 적도 있다.

 중앙대 손병권(정치외교학) 교수는 “파란불이 들어왔다고 무조건 좌회전 안 되는 것처럼 필리버스터를 무조건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라며 “선거법 처리 시한이 촉박한 시점에서 할 수 있었던 행위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화여대 유성진(정치학) 교수는 “정치에 타협과 협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국민에게 알린 과정이었다”며 “여당이 협상이나 타협을 전혀 하려 하지 않은 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글=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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