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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품격은 어디가 한수 위? 한국-미국 필리버스터 비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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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이 테러방지법 처리에 반대하며 필리버스터를 펼치고 있다.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듯, 의회나 정치 문화도 제각각이다. 곧잘 비교되는 미국과 한국의 필리버스터는 얼마나 다를까. 테러방지법에 반대해 필리버스터를 벌이고 있는 한국의 현재와, 미국 의회의 역대 필리버스터 사례들을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Q.‘나홀로 필리버스터’ 가능할까?

#1. 민주당 미국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고 있는 버니 샌더스는 2010년 12월10일 무소속 상원의원이던 당시 부시 행정부의 소득세율 인하 등 ‘부자 감세’ 조치를 막기 위해 필리버스터에 나섰다. 그의 열정적인 연설은 8시간 37분 동안 이어졌고 그를 일약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케 했다.

샌더스의 필리버스터는 그 혼자만의 결정이었다.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있는 의원들은 무언가 공동행동에 나섰을까. 그렇지 않았다. 민주당 보다 왼쪽에 있던 샌더스는 외로워도 99명 상원 전체를 상대로 지조있는 싸움을 펼쳤다.

#2. 테러방지법 처리에 반대하는 야당은 24일부터 필리버스터에 나섰다. 미국처럼 그냥 하고 싶다고 일방적으로 선포하면 되는 건 아니었다. 의원총회를 통해 더불어민주당은 소속의원 108명 전원의 서명을 받아 필리버스터를 공식 신청했다.

신청 다음날 곧바로 연설을 시작하기 위해서도 치밀한 작전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연설에 나설 순번을 짜는 것. 2월 임시국회가 끝나는 3월 11일까지 토론을 진행하기는 힘들지만 최대한 많은 시한을 끌기 위해서다. 초인적인 에너지를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물리적으로 한 사람이 연설을 도맡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나 할말 있소. 무제한으로 이야기하겠소’라는 식으로 선포한 후 혼자 연설하는 식의 필리버스터는 미국에서만 가능하다. 필리버스터를 비교적 폭넓게 인정하는 의회의 전통과 분위기 덕이다. 다만 미국 상원(100명)은 법안을 표결하기 앞서 토론종결 투표를 진행, 60명 이상이 찬성해야 필리버스터를 막을 수 있다.

반면 한국은 국회법에 신청 요건이 미국에 비해 엄격하다. 재적의원 3분의 1이상으로 못박고 있어서다. 신청이 받아들여진 이후에는 몇 명이 발언을 하건 상관이 없다. 한번 연단을 내려간 이후에는 다시 올라올 수 없다. 결론적으로 신청부터 발언까지 혼자서 책임지는 ‘나홀로 필리버스터’는 미국에서 가능하지만,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Q.토론의 품격, 어디가 한수 위?

#1. 미국의 의회 역사에서 대표적인 필리버스터로 손꼽이는 사례는 16시간을 연설한 휴이 롱 루이지애자나 상원의원이다. 자신의 정책을 옹호하겠다며 연단 올라선 그였지만 준비한 원고로 시간을 때우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는 필살기를 선보인다. 로크포르 치즈 샐러드 드레싱의 레시피를 읽고 굴튀김 요리법까지 이야기했다.

사실 미국 의회에서 이런 장면은 종종 연출된다. 필리버스터가 의제와 관계가 없어도 특별한 제재를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화번보부를 읽거나, 성경을 낭독하는 이도 있었다. 버니 샌더스도 필리버스터에 나서기 전 ‘전화번호부를 읽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 결과 샌더의 연설은 인상적이었고, 책으로 출판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2. 엿새째 이어진 한국의 필리버스터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야당을 옹호하는 쪽에선 성숙한 의회 민주주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체력의 한계를 딛고, 의원들이 최장시간 연설 기록을 잇따라 갈아치우는 모습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야당을 보는 불편한 시각도 만만찮다. 미국처럼 전화번보부나 음식 레시피, 성경 등을 읽는 경우는 없었지만 테러방지법 처리에 반대한다면서 의제와 관련없는 발언도 이따금씩 나왔다. 여당과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 관련성이 떨어지는 다른 사건이나 이슈를 언급하는 등이 대표적이다. 이번 필리버스터 비판론자들은 이런 행태를 야당의 발목잡기로 본다.

지극히 단순 비교한다면 한국 국회 토론의 질이 조금 더 높을 개연성이 있다. 국회법에서 토론의 주제를 의제 관련으로 못박고 있기 때문이다. 원천적으로 맥락에 안맞는 엉뚱한 이야기를 할 수 없게 해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단순 비교일 뿐 어느 나라의 제도가 더 좋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미국만 해도 샌더스의 필리버스터처럼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연설이 있는가 하면, 전화번호부나 레시피를 의미없이 줄줄 읽어내려가는 시간끌기용도 많다. 시간끌기에 대한 평가도 단순하지 않다. 이 시간끌기 자체도 소수파의 의미있는 정치행위로 인정하는 시각도 있다.

장주영 기자 jang.joo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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