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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충돌 직전의 ‘치킨게임’ 해법 없나?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모든 회담이 공개적이고 청와대가 직접 나서게 돼 협상 경직되고 운신의 폭 줄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불발, 북한 인민과 김정은 분리하는 새 대북정책 마련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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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가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중단하기로 결정한 다음날인 2월11일 개성공단에 머물렀던 남측 인원과 차량들이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통해 귀환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1월 6일 북한의 기습적인 4차 핵실험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어 한 달 만에 여섯 번째 인공위성을 가장한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종지부를 찍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핵실험 직후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반드시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잘못된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북한이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게 해야 할 것”(1월 19일 국무회의), “강력한 유엔 제재를 통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국제사회가 깨닫게 만들어야”(1월 25일 김성우 홍보수석 대독 메시지)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남북관계는 넌제로섬게임(Non zero-sum game) 대책 없는 ‘통일대박론’도 퇴장 운명

박 대통령은 최종적으로 ‘북한 정권의 생존’을 거론함으로써 대선 기간이나 정권 출범 이후 제시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상대에 대한 혹독한 대가로 12년간 가동된 개성공단을 전면 중단했다. 연간 1억 달러의 임금이 김정은의 핵과 미사일 개발 자금으로 유입되는 것을 차단했다. 남북관계 최후의 보루가 무너졌다. 남북관계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던 시기 이전으로 후퇴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고강도 제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 자국이 주도적으로 역할을 하지 않을 경우 명분에서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중국이 대북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상황에서 양자 제재라는 읍참마속의 고육지책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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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북한은 신뢰를 형성할 상대가 아니라 붕괴시켜야 할 적으로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종말은 정책의 잘못인가? 상대인 북한의 거부 때문인가? 아니면 애초부터 신뢰(trust)라는 이성적인 단어를 기초로 한 정책은 남북간에 추진될 수 없었던 꿈이었나? ‘무신불립(無信不立)’, 신뢰가 없으면 제대로 설 수 없다고 했지만 남북관계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신뢰를 바탕으로 출발을 시도했지만 종착역에 도착하기 전에 물거품이 됐다.

북한의 ‘간보기’와 남북 동상이몽의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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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위성발사장에서 발사된 북한 장거리 미사일.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관계자들과 함께 발사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 사진제공·노동신문

박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사실 출발부터 시련이었다. 역대 보수정부 첫해에 북한은 ‘간보기’ 정책으로 현란한 교란전술을 전개한다. 2008년 MB정부 출범 당시에는 10·4 정상회담 합의 이행에 따른 포용정책의 지속 여부를 둘러싸고 남북 갈등이 심했다. 갈등 이후 북한의 천안함·연평도 공격이 이어졌다. 집권 초기 일종의 양측 지도자 간 기선잡기 쟁탈전이었다.

박 대통령 역시 2013년 2월 13일 취임을 12일 앞두고 북한의 3차 핵실험에 직면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지만 인적·물적 교류를 차단한 이명박 정부의 5·24 조치는 여전히 작동됐다. 북한의 사과가 없는 상태에서 정책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웠다. 박 대통령 취임 직후 북한은 불가침 합의를 폐기(3월 8일)하며 판문점 연락 채널의 단절을 선언했다. 이어 남북협력의 유일한 현장인 개성공단은 근로자 철수로 가동이 중단됐다(4월 8일). 1차 위기가 촉발됐다. 짐을 바리바리 싣고 개성을 빠져나오는 피란민 같은 차량 행렬은 남북관계의 불안정성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연간 1000억원의 공단 현금을 포기하지 못하는 평양은 다시 남측에 손을 내밀었다. 북한이 금강산관광 재개 회담, 이산가족상봉 실무회담을 제의하며(7월 10일) 개성공단이 134일 만에 재가동됐다(9월 16일).

2014년은 남북 양측이 1차 샅바싸움을 마무리하고 관계 개선의 기회를 마련한 한 해였다. 김정은은 남북관계 개선의 분위기 마련을 촉구하는 신년사를 발표했다. 이어 박 대통령은 “통일은 대박”이라는 내용을 담은 신년 기자회견을 했다. 설날을 계기로 이산가족 상봉을 제안하였고 남북고위급접촉(2월 12일)에서 이산가족 상봉, 비방·중상 중단 등을 협의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처음으로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개최됐다. 여기까지는 순풍이 불었다. 박 대통령은 독일 드레스덴에서 평화통일기반 구축을 위한 3대 제안을 발표했다. 북한은 국방위 대변인 담화를 통해 드레스덴 선언을 비난했다. 북한은 독일에서 선언을 하는 것이 흡수통일을 겨냥한 불순한 의도라고 비판했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을 앞둔 3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베를린에서 대북 지원을 발표하던 당시와는 북한의 반응이 달랐다. 평양에 사전통보가 없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을 계기로 북한의 황병서·최룡해·김양건 등 실세 3인방이 전격 방남했다. 3인방의 청와대 방문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어 류제승 국방부 정책실장과 김영철 정찰총국장 간에 군사당국자 접촉(10월 15일)이 있었으나 결렬됐다. 2014년은 남북간 긴장 속에 접촉이 있었으나 만남 그 자체로 종료됐다. 바둑으로 보면 적진에 포석을 시도했으나 손발이 맞지 않는 형국이었다.

2015년 들어 류길재 통일부장관이 전격 교체됐다. 평양 특사 자임을 박 대통령에게 요청한 건이 외부로 노출된 것이 교체의 원인이라고 언론들은 추론했다. 취임 2년이 지나면서 학자 출신의 류 장관은 남북 당국이 직접 만나 문제를 풀기를 희망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박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에 맞지 않았던 행동으로 평가됐다. 또한 보수정부의 두터운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홍용표 신임 장관 내정자 발표 직후 류 장관은 통일부 간부들과 만난 자리에선 “노력했지만 기대했던 성과를 내지 못하고 물러나 아쉽다”고 언급했다. 북한 조평통은 “북남관계를 최악에 몰아넣고도 그것이 잘된 것처럼 떠벌여대고 있으니 과연 류길재야말로 대결부 장관임이 분명하다”고 비난했다. 2년간의 남북관계에서 얻어낸 것이 없는데 대한 화풀이였다.

북한, 만조에서 간조전략으로 급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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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수소폭탄 실험 발표 뉴스가 1월 6일 서울역 대합실 TV화면에 나오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2015년 하반기는 긴장과 합의 및 결렬 국면이었다. 목함지뢰 도발로 인해 8·25 합의가 도출됐다. 남북은 ‘무박 4일’에 걸친 마라톤협상 끝에 이산가족 상봉, 당국회담 개최, 민간교류 활성화 등을 합의했다. 추석을 계기로 박근혜 정부 들어 두 번째로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됐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제1차 차관급 남북당국회담(12월 11일)을 개최했으나 북측은 회담 하루 만에 중단을 통보함으로 성과 없이 끝났다. 북한은 남한이 금강산관광을 재개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했다. 남한은 현금이 유입되는 금강산관광에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통일준비위에 참석한 대통령의 발언에서 수차례 감지됐다.

북한은 제7차 당대회를 2016년 5월 소집한다고 전격 발표했다(10월 30일). 1980년 이후 36년 만에 개최를 선언한 것이다. 실속 없는 외부관계 개선보다 3대 세습 완성을 위한 내부 정지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2015년은 광복 70주년으로 요란하게 시작됐으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속담이 회자된 한 해였다. 기대가 크니 실망도 컸다. 바닷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북한의 전략은 만조에서 간조전략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이후 김정은은 대남 및 대국제사회 정책을 급선회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마이웨이(my way)가 본격화됐다. 모란봉악단의 베이징 공연을 전격 취소하고 철수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12월 12일). 이후 김정은은 수소폭탄 실험에 서명했다(12월 15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은 남북관계에 불길한 징조였다(12월 29일). 김영철 정찰총국장이 통전부장에 임명된 것은 남북관계에 악재였다. 김정은은 병신년 첫날 유화적인 신년사를 발표한 뒤 기습적인 4차 핵실험을 감행했다(1월 6일). 중국의 만류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달 만에 사거리 1만2000㎞의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2월 7일). 핵과 미사일이 ‘바늘과 실’과 같은 세트라는 것을 통해 위협의 강도를 높였다. 북한은 김정은의 친필 실험명령서를 공개함으로써 치적임을 집중 선전하였다.

추상적 개념이 대북정책 전반을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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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은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 이후 전방지역의 대북 확성기 방송을 136일 만에 재개했다. / 사진·중앙포토

정초의 고강도 연쇄 도발은 평양의 ‘1석4조’ 다목적 전략이었다. 첫째, 미국과의 협상 전략의 일환이다. 임기 말의 오바마 행정부를 강하게 압박해, 차기 대권주자들이 북한과 협상에 나서도록 사전 정지하는 작업이다. 지난해부터 주장한 평화협정을 지속적으로 제안해 최종적으로 핵군축 협상을 시도하고자 한다. 둘째, 중국과의 기선제압 전략의 일환이다. 9·3 중국 전승절 행사에 박 대통령이 참석하며 한·중 관계가 심화되는 데 대한 불만의 표출이다. 특히 김정은의 방중이 집권 5년이 되도록 성사되지 않고 모란봉악단 철수 등 소통 부재로 자신들의 입장이 관철되지 않는 데 대한 우회적인 압박전략의 일환이다. 셋째, 남북관계 답보에 대한 강경대응 전략이다. 8·25 합의 이후 금강산관광 재개를 위한 남북차관급회담(2015년 12월)이 결렬된 이후 대화보다는 군사적 압박이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7차 당대회 개최를 앞두고 핵·경제 병진 노선을 적극 관철하는 과정에서 북한 내부의 응집력을 결집하여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확고히 하고 3대 세습을 공고히 하려는 전략이다. 핵실험은 김정은의 치적이라고 선전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충성을 유도했다. 핵과 미사일 발사 이후 평양에서 불꽃놀이를 하며 김기남 비서는 “영광을 김정은에게 돌린다”고 연설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간 신뢰를 형성함으로써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며, 나아가서 통일기반을 구축하려는 정책이라고 통일부는 설명한다. 특히 남북간의 신뢰 형성을 최우선적으로 추진하면서 한반도 평화정착, 통일기반 구축을 의미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또한 신뢰는 서로 대화하고, 약속을 지키며, 호혜적으로 교류·협력하는 과정을 통해 점진적으로 축적된다.

4차 핵실험과 6차 미사일 발사로 신뢰가 형성되기는커녕 오히려 불신만 팽배해졌다. 평화를 깨는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도록 함으로써 협력의 길로 나오게 한다는 정책이라고 홍보하지만 결과는 실패로 귀결됐다. 남북간에 대화가 있었지만 북측의 진정성이 없었다는 것이 청와대의 평가였다.

평화를 깨는 행동에 대해 반드시 보복으로 협력의 길로 나오게 하겠다는 입장이지만 현실적으로 개성공단 폐쇄 이 외에 한국의 독자적인 제재는 사실상 한계가 있다. 개성공단 역시 북한의 현금 통로 차단의 효과가 있지만 124개 우리 기업의 폐업으로 이어진다는 차원에서 정부의 고민이 깊었다. 개성공단 폐쇄는 북한도 충격이지만 우리측 입주기업에게도 ‘혹독한 대가’가 돌아오는 양날의 칼이다.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추진하면서 세 가지의 정책 추진 배경을 제시했다. 첫째, 악순환을 단절하고, 북한을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견인하기 위해서다. 북한의 도발→ 위기→ 타협→ 보상→ 도발의 악순환이 반복됨으로써 불안정한 평화와 대결구도가 지속되는 남북관계를 타파한다. 도발에는 강력히 대응하고, 국제적 기준과 모든 합의를 준수하는 관행을 만들어 지속가능한 평화를 구축하려는 의도였다.

둘째, 북한 핵문제 등 한반도 안보위기의 근원적인 해결을 시도했다. 지난 20여 년간 정부와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악화된 북한 핵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시급하다. 신뢰 부재 상황에서의 일시적 해법으로는 북한 핵문제의 해결이 어려운 만큼 신뢰를 형성하여 근원적 해결을 추구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과거 대북정책의 장점을 수용해 통합적인 접근을 모색하고자 했다.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화·교류 중심의 포용정책’과 이명박 정부의 ‘원칙 중심의 대북정책’ 모두 북한의 의미있는 변화를 이끌지 못했으며, 핵개발 및 도발 저지에 한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기존 대북정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법을 구사해야 할 시점이며, 이는 대북정책을 둘러싼 갈등 해소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역시 기존 정부의 대북정책과 같이 북한의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지도 못했고 핵과 미사일 도발을 막는 데도 실패했다. 결국 3년간의 대북 정책은 냉정한 평가를 받으며 폐기 수순에 직면해 있다.

집권 4년차를 맞이해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은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변곡점을 맞을 수밖에 없다. 북한의 도발로 완전 리모델링을 해야 할 시점이다. 우선 리모델링에 앞서 지난 3년간의 정책을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가 종료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계는 있지만 잔여 2년의 유용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중간평가도 불가피하다. 정책의 전제조건, 추진과정, 추진의지 등을 분석하여 공과를 계산해 보자. 북한의 문제점은 물론이고 우리의 문제점도 냉정하게 짚어보자.

첫째, 사회과학적 개념이 애매한 단어들이 정부 대북정책 전면에 등장했다.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신뢰형성은 칼날의 양면이다. 남북간에 불신이 매우 높아 오히려 남측 주도로 신뢰에 입각한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나갈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했지만 현실은 역설적이다. 사회과학적으로 개념화하기 어려운 감성적 단어를 불신이 심한 남북간에 원칙으로 적용함으로써 현상과 속마음을 구분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했다. 요즘 확산되고 있는 공유경제(sharing economy)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우버 택시와 같이 행위자들이 편리함이라는 하나의 개념 속에서 움직인다. 신뢰와 편리함이 지지기반이다. 남북관계가 공유경제의 개념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편리함이라는 단일화된 기준이 작동돼야 한다. 하지만 남북관계는 경제적 이득, 체제존립 및 동북아 국제정치 등 복잡한 기준이 적용되는 특수한 국제관계다. 이러한 추상적 개념이 정책을 지배하는 일이 과거 정부보다 빈번하다는 점은 검토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는 ‘통일대박론’이다. 통일대박론은 국민에게 통일에 대한 무관심을 깨우치게 하는 긍정적인 화두였다. 하지만 통일대박론의 화두 이후 우리 사회가 통일에 대한 진지하고 구체적인 노력 없이 라스베이거스의 잭팟처럼 ‘통일이 어느 날 갑자기 올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이 만연했다. 독일통일에 대한 잘못된 학습효과 때문이다. 통일을 결과가 아닌 과정(Process)으로 인식한 독일인들이 준비했던, 조용하면서도 구체적이었던 노력을 간과한 결과다. 결국 통일대박론은 핵과 미사일에 의해 조용히 퇴장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통일 포퓰리즘은 지속되기 어렵다는 교훈을 남겼다.

대통령의 화두는 정책으로 무겁게 연결돼야 한다.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정책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정책이 지지되지 않는 화두는 저잣거리의 담론으로 격하될 수밖에 없다. 통일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실익도 없이 공연히 상대방의 두려움만 키울 필요는 없다. 공포는 군비증강으로 이어진다. 조용히 물밑에서 북한 주민의 의식 변화를 가져오는 독일식 동방 정책을 선별적으로 벤치마킹해야 한다.

남북관계가 넌제로섬게임임을 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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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오른쪽)이 지난해 8월 25일 판문점에서 황병서 북한 군 총정치국장과 악수하고 있다. 남북 당국자 접촉은 당분간 성사되기 어렵게 됐다. / 사진·중앙포토

둘째, 국제관계가 철저한 주고받기식의 넌제로섬게임(Non zero-sum game)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국가이익(interest)으로 움직이는 현실주의 국제정치이론(realism)을 간과한 것이다. 그 부작용은 남북간 회담이 겉돈다는 것이다. 회담장에서는 주고받는 득실 계산보다는 의도 분석에 중점을 두다 보니 진도가 나아가기 어려웠다. 특히 과거 회담이 물밑에서 80% 이상 논의되고 나머지 부분은 세리머니 형식으로 타결됐다. 남북관계 70년의 회담 패턴이었다. 악마하고도 협상은 불가피하다.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적인 관계 형성을 추구한 나머지 역설적으로 성과 도출이 미흡했다.

또한 주고받기에 소홀했다. 남북관계는 제로섬게임이 되기 어려운 병렬구조다. 어느 일방이 대박이면 타방은 쪽박이다. 손해를 본 타방은 즉각적으로 반격에 나서 균형을 맞춘다. 대표적인 사례는 이산가족 상봉이다. 북한은 2013년 2월, 2015년 10월 두 차례에 걸쳐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했다. 이산가족 상봉은 북한으로서는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한 사업이다. 과거 필자가 평양을 방문해 고려호텔에서 목격한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전국에서 500여 명의 대상자를 찾아내서 평양에서 한복과 양복 정장으로 갈아입혀 일주일 동안 집체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상봉을 마치고도 자본주의 오염물을 제거하는 총화교육을 역시 같은 기간 동안 시킨다. 요컨대 이산가족 상봉은 북측이 남측에 성의를 표시하는 사업이다. 동시에 상응하는 대가를 기대한다. 주로 식량지원 및 금강산 관광 재개 등 경제적 지원을 희망한다. 하지만 남측의 대가는 없었다. 남측은 북측과의 신뢰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등가성, 동시성 대가는 허용하지 않았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 북측이 기꺼이 그 정도는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셋째, 모든 회담이 공개적이고 청와대가 직접 나서는 형국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북한은 기존의 통통라인, 즉 통전부와 통일부 간의 협상보다는 주석궁과 청와대 간의 협상을 선호했다. 통일부와 협상해봤자 청와대가 직접 통제하니 아예 청와대 핵심인사를 겨냥해 처음부터 회담 당사자를 지목한다. 청와대가 직접 나서 협상할 경우 타결과 결렬이 분명하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협상이 경직적으로 진행된다. 양측 최고지도자 간의 의중이 정제되지 않고 반영됨으로써 타협에 제한을 받는다. 특히 회담 시작 전부터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에 노출돼 운신의 폭이 좁다.

1972년 5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밀사로 평양을 방문했다. 진통 끝에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남북합의인 7·4 남북공동성명이 도출됐다. 남북간 협상에서 일정 정도의 비밀주의는 불가피하다. 155마일에서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주고받기 협상은 물밑에서 가능하다. MB정부 시절 임태희 전 장관의 싱가포르 접촉은 공개협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부 전략은 없고 대통령의 입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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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의 개성공단 가동 전면중단에 맞서 북측이 개성공단 남측 인원 추방조치를 취함으로써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 사진·중앙포토

넷째, 남북 창구의 단일화다. 박 대통령은 2002년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 유럽-코리아 재단 이사 자격으로 방문해 김정일과 면담했다. 당시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 당국을 상대하는 창구를 직접 관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따라서 민화협 및 정치권 등 관련 분야 실세 인사들이 과거처럼 개별적으로 북한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했다. 과거처럼 실세들이 평양을 방문해 채널을 가동하는 것이 금지됐다. 창구 단일화의 장점이 있었지만 당국간의 힘겨루기가 심해졌다. 모든 협상 결과가 통일부로 가지 않고 청와대로 직접 향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사소한 안건에도 청와대와 주석궁이 부딪치는 사례가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대통령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구조가 노출돼 있다. 대북정책은 청와대가 결정한다. 하지만 그 의사결정 과정과 구조가 베일에 가려져야 한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의 외교·안보 컨트롤타워로서의 역할이 보다 세련되게 작동돼야 한다.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대북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인데 정부의 구체적 전략은 보이지 않고 대통령의 입만 보인다는 평가다. 박 대통령을 비롯한 외교·안보 부처 수장들이 연일 대북 강경발언을 내놓고 있으나 체계적이고 치밀한 전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이제 이와 같은 진단을 통해 박근혜 정부 임기 후반 2년의 정책의 윤곽이 새롭게 나와야 한다. 생명을 다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대체할 새로운 정책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시간은 부족하며 정책 추진 환경은 여의치 않다. 오는 4월 총선이 시작되면 당권 및 대권 레이스가 시작된다. 1년 반 남은 정부에서 공직자들은 정책을 창의적으로 추진하기 어렵다. 아니 추진하지 않는다. 하지만 ‘브레이크 없는 북한 다루기’를 치밀하게 정교하게 진행해 차기 정부에 넘겨야 한다.

우선 북한 인민과 김정은을 분리하는 대북 정책이 추진돼야 한다. 키신저(H kissinger)가 지적한 것처럼 외부 제재로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은 용이치 않다. 내부에서 균열이 생기도록 해야 한다. 북한 주민의 변화를 가져오는 다양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체계적인 대북 심리전이 중 장기적 관점에서 진행돼야 한다.

상대 이기는 빠른 방법은 반란을 유도하는 것

1940년 영국군 참모총장은 처칠 총리에게 ‘독일을 이기는 가장 빠른 방법은 반란을 유도하는 것’이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처칠은 나중에 ‘유럽을 불타오르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특수공작국(SOE) 조직을 즉시 창설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서방 연합군이 독일에 살포한 전단은 80억 장으로 추산된다. 서방의 심리전은 히틀러와 괴벨스의 선동을 무력화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영국은 1948년 외무부 내에 반공 선전활동을 전담하는 정보조사처(IRD)를 설립해 치밀한 비밀 선전전을 전개했다. IRD 중심의 심리전 공작은 1950~1970년대 이집트, 그리스, 말레이반도 및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공산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심리전이라는 용어는 1920년 영국의 군사심리 전문가 풀러가 논문 ‘1차대전 당시 영국과 독일의 전차전’에서 처음 사용했다.

북한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본격적인 심리전은 다음과 같이 수행돼야 한다. 첫째, 심리전 수단의 확대다. 둘째, 전담 전문조직이 구성돼야 한다. 현재 국방부와 국정원 등에서 진행되는 대북 심리전은 시너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심리전도 단기적 효과만을 지향하고 있다. 다양한 위장·가장 조직이 필요하다.

독일은 1939년 겨울 괴벨스의 지시로 “서유럽 전역에 우리의 비밀결사체인 ‘제5열’이 형성돼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실제 존재하지 않은 이 조직으로 서유럽은 공포에 휩싸였다. 가장 조직들이 휴민트를 활용한 결과다. 셋째, 전문적인 맞춤형 심리전이 은밀하게 중장기적으로 진행돼야 한다. 상대방의 취약점을 족집게처럼 공격해야 한다. 맞춤형 심리전으로 개혁과 개방의 바람을 평양, 원산 등 주요 북한 대도시에 불어넣어야 한다. 33세의 젊은 독재자 김정은을 상대하는 데 심리전이 체계적이고 조직적이지 않다면 앞으로도 그의 핵실험을 계속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한다.

한편, 북핵 해결을 위한 정부의 주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 남아공, 리비아, 우크라이나 및 2015년의 이란 등의 비핵화 사례를 분석해 한국이 향후 북핵 해결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어려울 때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고 중국을 비판하면 한·중 관계가 악화되고, 한·중 관계의 악화는 한국경제에 어려움을 줄 수 있다. 미국 역시 자국의 국익에 따라 움직이는 과정에서 북핵 해결에 소극적이다. 따라서 북핵의 당사자는 한국이라는 인식 하에 직접 남북문제 해결 구도를 형성하고, 6자회담 대표 국가를 적극 참여시켜 단계별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미·중 양국이 한반도 비핵화에 나서는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하고 설득해야 한다.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1991년 한반도 비핵화선언이 무효화됐고 한국도 미국 전술핵의 국내 반입이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공론화할 수 있다.

지난 2010년 발행된 세계적 과학저널리스트 매트 리틀리의 저서인 <이성적 낙관주의>가 주장하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대안 제시만이 인류를 발전시킨다는 사실을 한반도 통일에 적용하고 싶다. 북핵과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통일 대박의 담론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전략적인 주체적 사고와 구체적인 액션이 필요하다. 병신년 원숭이의 지혜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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