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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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의 과거 여행-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윤택림 지음, 역사비평사, 1만5천원

할머니.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가 역사의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른바 구술사(口述史)는 1990년대 이전 까지만 해도 역사소설의 소재로 쓰일 수는 있어도, 주류 역사학계에서 발붙일 틈은 없었다. 문헌 자료만이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보편적 진리와 권위의 해체를 시도한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주의)의 바람이 불며 젊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구술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근현대사의 민감한 사건의 경우 문헌자료가 별로 없다는 것도 한 이유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들은 근대화.민족주의.민중사관 등 거대담론을 중심으로 역사를 보던 관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거대담론이란 큰 칼로 역사를 재단하다 보니 개인 삶의 다양성이 억압.배제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 일상사.생활사 등을 중시하면서 큰 칼이 아니라 작은 칼로 역사를 해석하려고 한다.

이같은 '잘게 썰어 역사 보기'의 연장선에 서 있는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은 형식과 내용 두 가지 면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한 마을 주민의 구술을 중심으로 6.25 (한국전쟁)를 조명한 첫 '역사인류학'저술이란 점이 우선 눈길을 끈다. '역사인류학'이란 구술을 특징으로 하는 인류학적 방법론과 문헌 중심의 역사학의 접목을 시도하는 최근의 경향이다.

이 책의 저자 윤택림(42.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사진) 박사가 1989년 충남 예산군의 한 마을에 9개월간 체류하면서 60세 이상의 주민들과 직접 대화한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

예산군은 유명한 사회주의자 박헌영.이강국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책의 현지조사 내용은 저자의 박사학위(미국 미네소타주립대) 논문에도 반영돼 있다.

더욱 의미있게 보아야할 대목은 6.25에 대한 이 책의 내용이자 결론이다. 인터뷰에 응한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6.25를 '자족지란(自族之亂)'이라고 했다.

"6.25는 북한 사람들과의 전쟁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간의 전쟁"이었고, "같은 마을 내에서 이데올로기라는 가면하에 치러진 마을사람들 간의 개인적.감정적.정치적 주도권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개인적 감정이 이데올로기의 외피를 쓰고 학살의 만행으로 이어졌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같은 마을 사람들이 대립하게 된 연원은 뭘까.

이에 대해 마을 주민들은 일제시대 징용을 둘러싼 갈등이었다고 말했다. 징용에 끌려갔다가 해방 후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그들을 징용보내는 데 앞장 섰던 개인 및 집단과 갈등 상황에 빠지면서 그 갈등이 6.25를 통해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다는 설명이다.

인민군이 진주할 땐 좌익의 학살이 벌어지고, 미군과 국군이 진주할 땐 우익의 학살이 전개되는 식으로, 보복의 악순환이 이어진 것이다.

결국 저자는 예산군 한 마을에서의 6.25는 계급이 갈등의 주요 변수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예산군의 한 마을이 겪은 6.25에서 계급은 좌우익이라는 이념의 경계를 그어주는 여러 요인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이같은 결론은 80년대를 풍미한 민중사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적.민족적.정치적 단위에서 한국전쟁을 분석하는 모든 정통주의와 수정주의 이론과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가고 있다.

특정 마을에서 특정 개인과 가족이 어떻게 6.25를 겪었는지를 구술을 통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특정 마을에서 얻은 결론을 6.25에 대한 전체적인 결론으로 확대 과장하지 않는 점이 돋보인다.

저자는 중앙중심적인 '국가전체사(national history)'를 지양하고, 지방의 특수성을 재구성하는 '지방사(local history)'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제안도 내놓았다.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일부 지방 좌익들이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저자의 지향점을 엿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지방민들이 공유하는 정의'(local justice).도덕성.윤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조원보(가명.1912년생)는 투철한 지방좌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정성과 다른 지방민들이 그에게 가진 신뢰감은 그의 목숨을 건지게 해주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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