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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잡는 김종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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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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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논설위원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겐 두 개의 무기가 있다. 하나는 경제민주화고 다른 하나는 북한 정권 궤멸론이다. 그는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에게 경제민주화 날개를 달아주곤 당을 뛰쳐나왔다. 지금은 문재인 전 대표에게 영입돼 그 당에 들어갔다 북한 궤멸론이란 날개를 폈다. 원래 김종인의 역할은 더민주에서 친노친문·운동권 색깔을 빼고 ‘경제민주화 원조’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북한 궤멸론, 야권의 두 가설 허물어
부도난 회사 살려 새 회장 취임 가능

 그런데 관중석 유권자들의 관심이 의외의 곳에 쏠렸다. 김정은을 보는 김종인의 시각이다. 그는 기존의 야당에서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냈다. “소련이 핵이 없어서 망했나. 민생을 돌보지 않고 핵·미사일에 골몰하면 북한 정권은 궤멸할 것이다.” 경제학자이자 청와대 참모로 한·소 수교에 관여했던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전 경세가의 상황 판단이었다. 이 얘기가 정치 낭인 김종인일 때 나왔다면 대수롭지 않았을 것이다. 제1야당의 대표인 데다 비상대책위원장, 선거대책위원장을 겸해 공천 및 공약의 전권을 쥔 지위에서 나왔기에 반향이 크다.

 그동안 한국 야당의 주류는 북한에 관한 두 가지 가설이 지배했다. ①북핵은 북·미 간의 문제일 뿐 한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②북한 정권에 한국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한국을 바꾸는 일에나 전념하자. 김정일이 살았을 때 이 가설은 한국의 대북 정책에 스며들어 짭짤한 ‘평화 효과’를 냈다. 김대중(DJ)·노무현 대통령은 북핵이 한국에 그리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의 안전 측면보다 미국의 의심을 풀어주는 쪽에 주력했다. DJ는 “북한은 핵을 개발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북의 핵무기 개발은 자위(自衛)를 위한 측면이 있다”고 두둔했다. 김정일은 그 대가로 한국에 적절한 수준의 평화를 제공했다.

 현실적으로 가설 ①②의 부작용은 컸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북한의 책임을 면제해 주자는 의식이 확산됐다. DJ의 햇볕정책 때는 그래도 북한의 ‘변화’라는 목표가 살아 있었다. 노무현 시대에 와서 북한은 한국이 ‘양보’해야 할 상대로 격상됐다. 친노 야권시대에 문재인 같은 주류 지도자들은 핵 문제에서 북한의 책임을 묻는 것을 ‘금기’시했다. 북한에 핵 책임을 물으면 개념 없는 진보, 햇볕정책의 공격자, 노무현의 적대자처럼 비춰지는 문화가 형성됐다. 이번 북한의 4차 핵·미사일 도발에 대해 문재인은 한국 정부를 향해 “전쟁을 하자는 것이냐”고 분개했다. “핵이 김정은 정권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지적은 했지만 우리 쪽에 더 많은 책임과 문제를 제기했다. 그의 이런 언행은 변화→양보→금기라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형성된 친노·운동권 문화의 전반적인 대북 인식이다. 한국인의 자주 의식은 쇠퇴했다. 우리는 희생하지 않고 다른 나라가 우리를 위해 움직여주길 바라는 공짜 안보론이 무성하다. 김종인은 “북한은 한국과 재래무기 경쟁에 드는 돈을 감당할 수 없어 핵을 택했다. 미국만 의식한 게 아니다.” “내밀한 역사적 순간, 새벽처럼 어떤 모멘텀이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꾸준히 국력을 키워 통일비용을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월간중앙 2016년 3월호 인터뷰). 친노친문·운동권의 전통적인 대북 가설 두 가지를 허무는 발상이다.

 김종인은 북핵이 한국인을 겨냥한 것이며 북핵에 대해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햇볕·포용정책이 노련하고 경험 많은 김정일 시대 땐 효과를 냈으나 과격하고 충동적인 김정은 정권에선 수정돼야 한다고 했다. 김종인의 북한 궤멸론은 경제민주화 공약과 함께 더민주 총선을 이끄는 두 개의 수레바퀴가 될 것이다. 그의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라는 프레임은 간결하나 위력적이다. 유권자들은 북핵에도 질렸고 강자 위주의 경제도 손을 보고 싶어한다. 김종인이 내부 노선 투쟁에서 이 프레임을 확립하면 안철수가 선점한 중도 지지층까지 흡수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부도난 회사를 살려 스스로 회장에 취임하는 특별한 정치 지도자가 될지 모른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