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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왕이·차오량·쑹훙빙의 중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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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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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논설위원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홍문연(鴻門宴)의 칼춤을 말했을 때 내 머릿속엔 한 사람이 떠올랐다. 차오량(喬良) 준장. 중국 국방대학 교수이자 내로라하는 군사전략가다.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열 살에 『손자병법』을 탐독했다는 그는 ‘군사학의 천재’로 불린다. 그가 1999년 왕샹쑤이(王湘穗)와 쓴 『초한전(超限戰·Unrestricted War)』은 ‘세계에서 가장 앞선 군사이론’이란 평을 받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모든 것이 전쟁의 수단이 되며 모든 영역이 전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가 테러, 첩보·외교, 금융이나 미디어도 유력한 싸움 수단이란 것이다. 일본은 2010년 센카쿠 열도의 중국 어선 충돌 사건을 이런 초한전의 전략에 따라 치밀하게 전개된 도발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미국 달러 패권에 맞설 때
중, 정치·군사·경제는 하나

 그 차오량의 지난해 강연 하나를 인터넷 언론 프레시안이 얼마 전 소개했다. 골자는 이렇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위협은 군사적인 게 아니라 금융이다. 미국은 달러 강약 조절을 통해 타국의 부를 송두리째 뺏어왔다. 미국의 달러 패권으로부터 중국의 경제를 지키는 게 중국 군의 사활적 과제다. 중국 주변에서 (군사·분쟁) 위기가 일어나 국제 자본이 중국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10년쯤 전으로 거슬러 가보자. 그때 중국엔 쑹훙빙(宋鴻兵)의 『화폐전쟁』이 떴다. 수백만 부가 팔렸고 전 세계 30여 개국에 번역됐다. 서방 자본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낱낱이 파헤쳤다. 중국이 진짜 대비해야 할 것은 미국 자본의 공습이라는 게 골자였다. 사실과 음모론을 적절히 배합해 읽는 재미가 쏠쏠했던 때문일까. 한국의 식자들에게도 꽤 읽혔다.

 그걸로 그만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후 쑹훙빙류가 수십·수백 권 쏟아졌다. 내 책꽂이에도 어림잡아 20여 권이 있다. 『기축통화 전쟁의 시작』 『자본전쟁』 『화폐전쟁, 진실과 미래』 『G2전쟁』… . 제목과 저자, 시기만 다를 뿐 대동소이다. 관변학자들은 물론 국영방송 편집부까지 동원됐다. 이때 중국은 굴기의 나라였다. G2란 말이 등장했고, 곧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란 자신감이 있었다. 생산·소비·수출 같은 실물은 시간 문제다. 걸림돌은 금융이다. 금융만 되면 미국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전통·인맥·네트워크가 실력인 금융은 폐쇄·단절의 대륙 중국이 결코 일거에 흉내 내거나 따라잡을 수 없는 경지, 바로 공포이기도 했다. ‘언제든 미국의 경제 핵무기 금융에 당해 나라 경제가 쑥대밭이 될 수 있다’. 이런 공포가 중국 지도부에 스멀스멀 퍼졌다. 어느 틈에 중국에서 정치·경제·안보는 이음동의어가 됐다. 그것이 미국에 대한 것이라면 특히.

 이런 공포심이 과민 반응하다 보니 터져 나온 게 지난해 주가 폭락 때 주식거래 정지며 무차별 외환 개입 같은 초(超)시장적 정책이다. 조지 소로스의 위안화 공격에 “가만두지 않겠다”며 환구시보가 원색 비난한 것, 중앙은행 총재가 “투기 세력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직격탄을 날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미 대륙에선 통화전쟁이 시작됐다. 하루 1000억 달러의 공방이 매일 벌어진다. 3조 달러의 외환보유액으로도 감당 못할 수 있다. 문을 닫아 걸어도 소용없다. 홍콩 증시를 통해 연결돼 있는 데다 13억이 1인당 5만 달러씩 들고나갈 수 있다. 이렇게 유출된 돈이 지난해에만 약 1조 달러다.

 그러고 보니 왕이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에 보이는 알레르기 반응을 이해는 하겠다. 그렇다고 홍문연의 칼춤에 빗대 한국마저 미국의 졸개 취급한 건 큰 잘못이다. 대국답지 못하다. 그런 중국이 밉고 서운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대비해야 한다. 속 좁은 중국이 화풀이할 수 있다. 유커가 줄어들 수 있으며 이유 없이 반도체나 배터리 수출이 막힐 수 있다. 이래저래 중국으로 먹고사는 일이 더 힘들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비해야 한다. 용의 등에 올라타지 않으면 어차피 한국의 미래는 없다. 건드리면 주인도 물어 죽인다는 역린(逆鱗)은 놔두고 용을 다루는 지혜를 익혀야 할 때다. 중국이란 용의 눈에는 정치·경제·안보가 이음동의어다.

이정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