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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일본 기행] 6. 달라진 국정 운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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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일본 정부가 나라 살리기에 나섰다. 10년 불황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이다. 중앙과 관료에 집중했던 국가의 중심축을 지방과 민간으로 옮기려는 게 그 핵심이다. 그러나 이 같은 총체적 개혁이 자칫 일본의 우경화 또는 군사강국으로의 탈바꿈을 불러올 가능성도 없지 않다.

도쿄(東京)항은 아홉개의 부두를 갖춘 일본 최대의 컨테이너항이다. 도쿄 도심에서 자동차로 30~40분 거리다. 지난 11일 오전 그중 하나인 오이(大井)부두를 찾았다. 대형창고.야적장에는 컨테이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도로는 컨테이너 트럭들로 가득 차 있었다.

<버블 붕괴 후 경제성장률>

일본 정부는 지난 4월 9개 부두를 국제항만특구로 지정했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는 전국의 항구.공항의 통관절차를 일률 규제했다. 그러다 보니 금요일에 들어온 화물의 통관수속이 월요일에나 이뤄지는 등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특구로 지정되면서 통관절차.수수료 등을 자율적으로 정하게 됐다. 도쿄도 항만국 진흥과의 오자와 히로유키(小澤洋之)계장은 "하루만에 통관을 끝내고, 야간.휴일 수수료를 절반으로 내려 기업의 통관비용이 30% 이상 줄게 됐다"며 "이용자가 많아져 통관 컨테이너 개수가 2001년 2백61만개에서 2007년에는 3백60만개로 늘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본 정부는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지난 4월 경제.교육.복지 등 다양한 내용의 특구사업 1백17건을 처음 승인했고 앞으로 계속 확대할 방침이다. 특구는 장기불황에서 벗어나려는 일본 정부의 몸부림 가운데 하나다.

개혁의 몸부림은 1990년대 중반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총리 시절에 그 씨가 뿌려져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 취임 이후 여러 분야에서 추진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취임 직후 자민당에 국가전략본부를 설치,경제구조.정치시스템.외교안보.국가정체성.지방활성화 등 8개 분야에서 새로운 틀을 짜고 있다.

야스오카 오키하루(保岡興治)자민당 국가전략본부 사무총장은 "일본은 19세기 메이지(明治)유신 이후에는 근대화, 태평양전쟁 후에는 경제발전이란 공동목표를 향해 정부.국민이 열심히 뛰었는데 경제발전 목표 달성 후 장기침체기에 빠지면서 방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본은 기술.돈.교육력.자연.문화 등 기본요건은 모두 갖추고 있어 국가관리시스템만 바꾸면 재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국가 경영 패러다임'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지방 행정.재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2005년 3월까지 3천1백여 지자체를 1천여개로 줄인다는 방침 아래 각종 지원을 내세워 통합을 유도하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18건이 이뤄졌고, 1천2백여곳에서 검토 중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두차례 있었던 지자체 대합병은 국가 재설계를 의미한다.

지방재정의 자율성.책임을 높이는 삼위일체(세원 지방이양.국고보조금 폐지 및 축소.지방교부세 대수술) 개혁도 추진되고 있다. 중앙정부가 전국을 획일규제했던 방식에서 탈피, 특구.대합병.재정개혁으로 자율권.자생력을 갖춘 지방을 만든 후 지역단위로 경제를 키우겠다는 것이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역사)도쿄대 명예교수는 "중앙에서 돈을 걷어 공공공사.보조금 등을 통해 지방을 먹여살리던 사회자본주의적인 일본 시스템이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분석했다.

버블 붕괴 후 관료집단도 도마에 올라 정치권.사회의 '뭇매'를 맞고 있다. 하시모토 전 총리가 관료 수를 줄이기 위해 정부조직 개편을 한 데 이어 고이즈미 총리는 외무성 등 주요 부처에서 민간인 기용을 늘리고 있다. 총리가 외교를 주도하고, 편의점에서의 일반 약 판매 허용 여부를 결정하는 등 행정의 축이 직업관료에서 정치인에게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

야스오카 사무총장은 "관료 시스템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경제발전을 성공적으로 주도했지만 버블 붕괴 후 큰 변화에 둔감하고 새로운 국가 만들기에 실패했다"며 "이제는 국민의 지지를 받은 정치권이 국가 운영을 주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정책 브레인인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정치)도쿄대 교수는 "장기 불황의 원인은 경제정책이 아니라 과감한 결정을 못하는 합의식 정치제도에 있었다"며 '강력한 리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많은 관료들은 "정치권이 잘못해 놓고 관료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관료들의 저항으로 고이즈미 총리가 시도하려는 지방공공사업 축소 등 구조조정 개혁정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다는 지적도 많다.

국가경영의 틀을 바꾸려는 움직임은 결국 헌법 개정 추진으로 모아진다. 일본 헌법은 패전 후인 1947년 제정된 후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버블 붕괴 후 헌법 개헌 주장이 커지더니 2000년 국회에 헌법조사회가 설치돼 본격적인 개헌작업이 시작됐다.

모든 정당이 참여하고 있는 헌법조사회는 일왕제.정치제도.외교안보 등 국가행정의 모든 분야에 관해 조사한 후 지난해 11월 중간보고서를 냈다. 나카야마 다로(中山太郞.자민당 의원) 헌법조사회 회장은 "시대변화에 맞춰 고칠 것은 고치고, 인권보장 강화.환경권.헌법 재판소 신설 등 새로운 내용은 헌법에 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전쟁.군대 보유를 금지한 9조도 개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나카야마 회장은 "북한 문제 등 안전보장은 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주간시사지 아에라(6월 16일자)가 20~30대 중의원 42명을 조사한 결과 64%(27명)가 9조 개헌에 찬성하는 등 전후세대 의원들 상당수가 '일본의 국방력 강화'에 찬성하고 있고, 최대 야당인 민주당도 안보 문제에 관한 한 자민당과 한 목소리다.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민주당 간사장은 "상황에 맞춰 헌법개정을 검토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9조가 개헌되면 지금까지 유지돼온 방어 중심의 외교안보 틀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후쿠시마 미즈호(福島瑞穗)사민당 간사장은 "일본은 지난 10년 동안 해외파병을 확대하는 등 평화를 잃었는데, 개헌되면 군사대국을 향해 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도쿄=오대영.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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