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탄원서만 4년을… '이태원살인' 피해 어머니의 19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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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전 ‘이태원 살인사건’ 당시 아들 고(故) 조중필(당시 22세)씨를 잃은 어머니 이복수(74)씨는 29일 피의자 아서 존 패터슨(37)에게 징역20년 형이 선고되자 "마음이 후련하고 좋다"고 말했다.

재판정에서 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던 모습과 달리 안도감이 얼굴에 나타났다. 이씨는 "미국으로 돌아간 살인범을 19년 만에 데려와 벌을 주니까 중필이도 이젠 마음을 좀 놓을 것 같다"고 했다. 이씨는 또 "범인도 못잡아서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항상 중필이 한테 미안하고 죄짓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이에 앞서 1심 선고를 하루 앞둔 28일 오후 이씨는 기자와 마주 앉았다. 서울 자신의 집으로 찾아간 기자를 앞에 두고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진실 규명이 늦어짐에 따른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씨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인터뷰 내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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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랜만에 아들 조중필씨의 사진을 넘겨보는 어머니 이복수씨

사건이 벌어진 날을 기억하시나요.

1997년 4월 3일 '시립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온다'며 집을 나섰던 아이가 저녁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어요. 저녁 10시경 전화벨이 울렸죠. 순천향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였어요. 아빠 몰래 차를 몰고 나갔다가 교통사고라도 난 줄 알고 주차장을 살펴봤는데 차는 그 자리에 있었어요.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는데 경찰이 영안실로 들어가라고 하더라고요. 아빠만 들어가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기에 가서 봤더니 눈을 뜨고 죽었더래요.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아빠가 눈을 감겨줬죠. 장례 치르면서도 자꾸 안 죽은 걸로 생각이 됐어요.

이씨는 나이 탓에 기억력이 안 좋아졌다고 했지만 중필씨와 관련된 모든 날짜는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19년이 지난 이 시점에 심지어 시간 까지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수사과정은 어땠나요.

이렇게까지 말썽이 될 줄 알았으면 천천히 5일장 치르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을 맡기는 건데…

아들이 죽고 이틀 지난 5일이 일요일이었어요. 국과수가 쉬는 날이었으니까. 검사가 자신이 아는 의사가 있다며 부검을 서둘렀어요. 3일장만 하라며. 정신도 없고 검사가 하자니까 시키는 대로 했죠. 그런데 부검의가 처음 애는 몸집이 큰 애(에드워드 리)가 범인이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작은 애(패터슨)도 범인 일 수 있다고 말을 바꿔요.

그때부터 믿음이 안 갔죠. 이번 법정에서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검사가 물어볼 것이 있으면 오라고 해서 찾아갔어요. 낮 2시에 그건 잊어 먹지도 않네. 갔는데 술이 많이 취해 있었어요. 혀가 꼬부라졌어 검사가. 자기 혼자 중필이가 불쌍하다고 울더라고요.

앞에 책상에 눈물 콧물 닦은 휴지만 수북이 쌓였어요. 우리는 궁금한 게 있는데 묻지도 못했죠. 그래도 같이 간 중필이 친구가 '사법고시 패스했는데 잘하겠죠'라고 해서 믿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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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필씨는 어머니 이씨와 함께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검찰이 진범으로 지목한 리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고, 패터슨은 검찰이 출국금지 연장을 신청하지 않은 틈을 타 미국으로 출국했다. 죽은사람은 있지만 죽인 사람은 없었다.

지목된 혐의자 리가 무죄로 풀려났을 때 어디 계셨어요?

재판정에 있었죠. 무죄판결을 내리는 순간에는 아무런 생각도 안 났어요. 정신이 나갔죠. ‘범인은 누군가, 이런 법도 있나’라는 생각에 기운이 다 빠져 항의도 못했죠. 사실 항의를 할 곳도 없죠. 어디다 대고 항의를 하겠어요. 한 놈은 무죄로, 한 놈은 잠깐 감옥에 있다 풀려났는데.

그럼 우리 아들은 누가 죽인 건가요. 법정에서 나오는데 리 아빠가 밖에서 '거봐요 우리 아들이 안 죽였잖아요. 우리 아들은 마약은 해도 사람만큼은 안 죽였어요'라고 하더라. 그러길래 내가 '자식도 더럽게 키워놓고 뭘 그러냐'고 한마디 하고 나와버렸죠.

그녀는 이후 탄원서를 모으기 위해 큰 사위와 전국을 돌아다녔다. 지방대학도 돌았다. 조선대 법대생들이 “이 사건으로 모의재판을 열겠다”고 해서 판결문도 가져다 주고 매 재판마다 참석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노래교실 주부들이 모이는 노래방도 상관없었다.

탄원서는 어떻게 모으셨나요?

두 놈이 풀려나고 변호사 사무실,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등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하나같이 변호사들이 '우리나라는 약소국이라 미국 애들한테 벌을 못 준다. 일사부재리 원칙 때문에 안된다' 등을 들먹이며 처벌 못 한다는 말 뿐이였죠.

그때부터 4년 넘게 탄원서를 모으러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하루종일 굶고 화장 실가는 것도 힘들 정도로 몸도 너무 아팠어요. 그래도 억울한 생각에 악으로 다닌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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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필씨는 음악을 듣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후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에서 조중필씨 이야기를 다루면서 언론과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2009년에는 당시 법사위 소속이던 한나라당 주광덕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이귀남 법무부장관에게 패터슨의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고 인도요청이 빠르게 진행됐다.

마침내 지난해 9월 23일 패터슨이 국내에 송환됐다.

패터슨 송환 되는 날 심경이 어땠나요?

2010년 이 사건을 담당하던 박철완 검사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패터슨을 지금 데리고 오고 있고 내가 다시 사건을 맡게 됐다'고. 조금 있으니까 기자들한테 전화가 와서 같이 공항가자고 하기에 안 간다고 했어요. 몸이 덜덜 떨리고 가서 내가 욕이라도 잘 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그런데 지금은 약간 후회가 되요. ‘그 때 가서 가서 물이라도 껴 얹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법정에선 눈앞에 있어도 그럴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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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복수씨는 "중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다.

법정에 매일같이 출석하셨던데요.

이틀은 너무 어지러워 약을 먹고 누워있었고 나머지 재판은 전부 참석했어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요. 법정 문을 열 때마다 하는 생각은 ‘판사님이 제대로 벌 주실까. 많이 줬으면 좋겠는데… ’하는 것뿐이에요.

최후 진술 하는 날 우황청심환 두 개를 먹었는데도 패터슨 옆에 가니까 떨려서. 내가 무슨 말 했는지 기억도 안 나요. 더 잘했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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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수학여행 당시 조중필씨의 모습.


언제 아들이 가장 보고 싶으세요?

명절 때 남편과 둘이 저녁에 씁쓸하게 집에 있을 때요. 중필이는 인사도 잘했어요. 매일 오며 가며 우리한테 인사하고 다녔는데, 지금이라도 '학교다녀왔습니다'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고 그래요. 요새는 꿈에도 통 안나오네요. 꿈에서라도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 얘기해줬으면 좋겠는데.

과거 이씨는 꿈속에 나타난 아들에게 “큰놈이 범인이냐, 작은놈이 범인이냐” 고 물었다고 했다. 중필씨는 “자신을 따라오면 알려 주겠다”며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씨는 따라갈 수 없었다. 바로 앞에 큰 계단이 있었는데 그곳을 오를 수 없었기 때문. 어머니는 “내가 그때 따라갔어야 되는 건데, 그게 너무 안타까워”라고 말하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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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말썽을 일으킨 적 없었다는 조중필씨의 유년시절 모습.

74년 태어난 중필씨는 이씨가 딸 셋 이후 마지막으로 낳은 소중한 아이였다.

당시에는 남아선호 사상이 강해서 ‘딸만 낳는다’고 동네에서 구박을 많이 받고 다녔지만 중필씨가 태어난 뒤론 기를 펼 수 있었다고 한다.  중필씨를 포함해 할머니, 할아버지 등 11식구가 함께 살았다.


중필씨는 어떤 아이였나요?

정말 착했고 공부도 잘했죠. 초등학교 때는 전 과목 100점도 맞았고 성적도 ‘수’가 ‘우’보다 늘 많았어요. 항상 '엄마 나랑 같이 영화 보러 갈래'라고 물어봐주고. 난 사실 영화 잘 모르는데 그냥 중필이 따라가는 게 좋았어요.

음악을 좋아해서 자기가 아르바이트해서 힘들게 모은 돈으로 140만원인가 주고 일제 오디오를 샀어요. 그걸 잘 쓰다가 군대 가기 하루 전날 갑자기 설운도, 현철 CD를 저에게 가져왔어요. 그리곤 '엄마 내 생각나면 이거 틀고 들어'라고 하고 군대 갔어요. 그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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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필씨는 여행도 좋아했다고 한다. 어머니 이씨는 "중필이와 함께 벚꽃여행을 가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고 했다.

중필씨는 여행도 좋아했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이씨에게 “우리 벚꽃 보러 진해로 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중필씨 할머니가 백내장 수술로 치료 중이라 어머니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군 제대 후에도 벚꽃구경을 권했지만 당시 허리 통증으로 움직이기 힘들었던 어머니는 또 한차례 거절했다.

‘멀리는 못 가도 가까운 데라도 가야지’하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태원에서 일이 생겼다.

정혁준 기자 jeong.hyuk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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