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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권에 억눌린 ‘가족 민주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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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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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 지역뉴스부장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오랜 측근인 권노갑(86)씨가 최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면서 던진 의미심장한 발언이 여운을 남겼다. 산전수전 두루 겪은 노정객은 탈당 회견에서 “평생을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하며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이끌어왔지만 정작 우리 당의 민주화는 이루지 못했다”고 참담한 심경을 토로했다.

 ‘가신(家臣)정치’라는 전근대적 행태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그가 작금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여의도 정치에 일격을 가했으니 이런 역설이 따로 없다. 권씨의 발언에 문재인 더민주 대표는 “무척 아프다”고 반응했다. 분당 와중에 우호 세력을 잃어 아프다는 말인지, 아직도 갈 길 먼 정당 민주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아프다는 뜻인지 분명치 않았다.

 대한민국에는 여의도 정당정치보다 민주화가 한참 덜 된 곳이 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한 곳이 가족 내부다.

 가족 구성원들의 상호 관계를 부부와 부모·자식관계로 구분해 들여다보면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나마 부부 관계를 보면 민주적·수평적 관계로 혁명적 변화가 진행 중이다. 여권 운동과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가 확대되면서 발언권이 커졌다.

 부모와 자식 관계를 보면 여전히 전근대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요소가 판친다. ‘자애로운 부모와 효도하는 자식’을 뜻하는 부자자효(父慈子孝)의 전통적 가치는 실종됐고 새로운 가족관계 롤 모델은 안착하지 못하고 있다.

 가내(家內) 민주주의에서 가장 심각한 사각지대는 30∼40대 이하의 젊은 부모와 미성년인 자식의 관계다. 가족 구성원들이 이미 성인이 됐다면 각자의 선택과 자기 권리 보호가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14세 이하, 특히 영·유아 자녀의 권익은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기도 부천시 최군에 대한 부모의 살인 및 시신 훼손 사건, 광주시 40대 가장의 일가족 살해 및 자살 사건이 극명한 사례다.

 부모의 어릴 적 학대 경험, 경제적 빈곤과 정신적 스트레스 등이 원인으로 거론되지만 삐뚤어진 친권(親權) 의식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의사표현도 저항도 못하는 어린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고 생명과 꿈을 함부로 짓밟았다.

 전횡하는 ‘수퍼 갑(甲)’ 부모에게는 사회적·법적 제동 장치가 필요하다. 영·유아가 가정 폭력에 희생된 뒤에 정부가 대책을 논하는 것은 늦다. 가내 민주화 진전을 위해서는 공동체가 적극 나서야 한다. 어린이집·유치원·초등학교 단계에서 충효(忠孝)뿐 아니라 가족 민주주의 교육을 해야 한다. 결혼과 출산을 앞둔 예비 부부에게 부모교육도 필요하다. 교사와 지역사회의 감시와 견제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집안에서 학대당하는 아이들은 지금 ‘당신은 과연 준비된 부모인가요’라고 묻고 있다.

장세정 지역뉴스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