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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연재소설] 판게아 - 롱고롱고의 노래 <24> 거대 숫자들 사이에 선 아빠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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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임수연

깊은 우물에 묻어둔 노래를 발견하다

절벽으로 몰아치는 바람 사이 들려온
사월의 훈풍 같은 목소리와 대화 끝에
만남을 허락받은 수리와 친구들은
날개 편 썸을 타고 아빠를 향해 가는데

멀리 사비의 비명 소리가 꿈처럼 들렸다. 수리와 모나는 눈을 감았다. 순간 바람이 멈췄다. 수리와 모나를 절벽으로 몰던 죽음의 바람은 이제 그 둘을 꽉 잡고 있었다. 어디선가 사월의 훈풍과도 같은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눈을 떠봐!”

가슴 떨리는 억양이었다.

“마음의 눈을 떠!”

터질 듯한 심장에 수리는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기막히게 멋진 우주 광경에 수리는 넋을 잃었다. 가운데에는 은하수가 가로지르고 있었고, 은하수 주변에는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아기 우주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수리와 모나는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아래를 내려다봐!”

아름다운 목소리의 명령에 수리와 모나는 고개를 숙여 저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

수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신비한 우주의 그림을 품은 나스카 사막인 줄 알았다. 절벽 아래 평원은 거대한 숫자들을 품고 있었다. 수리가 그토록 찾았던 숫자였다.

52. 09. 42. 532. N

13. 13. 12. 69. W.

360. 72. 30. 12. 25920.

숫자들은 어른 평원에 거대하게 하나씩 도드라져 있었다. 수리 앞에 홀연히 나타나 바람처럼 깜박이던 바로 그 숫자들이 수리 앞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이…숫, 숫…자들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수리는 말까지 더듬었다.

“나도 이런 풍경은 처음이야. 세상에 이런 게 있다니…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니…하하, 하하하.”

모나는 자꾸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사비가 숨가쁘게 달려와 수리 옆에 서 있었다.

“나스카 사막에만 신비한 그림이 있는 줄 알았는데…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잖아?”

사비는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건 사비 네가 몰라서 그런 거야. 하늘에서만 관찰 가능한 거대 그림은 나스카 사막에만 있는 게 아니야. 세계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어. 난 거대 그림이 거석 문명과 분명히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아빠가 이곳에 온 이유, 그리고 내가 이곳에 온 이유, 폴리페서가 이 숫자들을 강탈하려는 이유, 그리고 네피림이 숫자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이유는 모두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거지. 공부 좀 하렴, 사비.”

사비가 수리를 흘겨보았다. 수리는 그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수리, 내가 이렇게 분노의 눈길을 보내는데도 웃어? 멘탈 갑이다!”

그러나 수리는 얼굴만 웃고 있을 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놀란 사비는 그저 쳐다보기만 했고, 뒤늦게 도착한 마루도 수리를 보고 굳어버렸다.

“뭐야? 너희 사랑 싸움했어? 수리가 사비에게 상처를 주었구나. 사비야, 내가 그랬잖아! 세상에 믿을 남자는 나밖에 없다고.”

마루가 눈치 없이 설레발쳤다.

“이거였구나. 깊은 우물에 묻어둔 노래.”

“깊은 우물에 묻어두었지만 잠시 사라진 노래.”

수리와 모나가 차례대로 말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거대한 진실과 마주한 느낌이야. 그런데 무서워.”

수리는 진짜 두려웠다.

“아, 아빠다.”

마루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저 아래, 아래를 봐봐. 저 거대 숫자들 사이에 아빠가 있어.”

모두 마루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마루의 말이 사실이었다. 저 아래에 아빠들이 있었다. 아빠들은 각각의 거대 숫자 옆에 아직 밝혀진 적 없는, 장차 수리가 밝혀야 할, 네피림에게 주어야 할, 바로 그 숫자의 의미 위에 서있었다.

“아빠, 아빠.”

수리는 목이 터질 정도로 크게 아빠를 불렀다.

“아빠, 아빠.”

사비와 마루도 아빠를 쉼 없이 불렀다. 그에 답하듯 아빠가 손을 흔들자 아이들은 펄쩍펄쩍 뛰며 좋아했다.

“내려가 볼래.”

사비가 먼저 얘기를 꺼내자 모두가 야단법석이었다. 문득 수리가 말했다.

“그런데 아빠가 왜 저기 계시지? 좀 이상하지 않아?”

사비도, 마루도, 골리 쌤도, 썸도, 볼트도 모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아빠가 바로?”

“아빠가…?”

“바로 아빠가?”

“아빠가 레뮤리아인?”

“아빠는 우물에 노래를 묻어둔 자들인 거야. 맞아? 그렇지?”

서로 한마디씩 하며 흥분했다. 그때 다시 사월의 훈풍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눈을 떴니? 마음의 눈을 떴어?”

수리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아직 뜨지 못했어.”

“무슨 소리예요? 난 마음의 눈을 떴어요.”

수리는 버럭 화를 냈다.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눈을 갖고 있어. 하지만 실제로 보이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해. 장님물고기 ‘올름’과도 같지. 눈은 그저 흑과 백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거든. 마음의 눈을 뜨면 시간과 시간 사이, 공간과 공간 사이에 숨어있는 비밀을 볼 수 있게 되지.”

그 말에 수리는 금세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혹시 아빠가 홀로그램이에요? 이번에도 그런 거예요?”

“글쎄?”

사비와 마루가 곧장 불만을 쏟아냈다.

“이건 장난이야. 우릴 갖고 노는 거라고! 그렇다면 저 아래의 숫자들도 홀로그램일 수 있는 거잖아?”

“홀로그램이면 어때? 어차피 그렇다고 거대한 진실이 달라지지 않아.”

수리가 외쳤다.

“오, 대단한 걸? 우주의 비밀을 하나씩 풀어가고 있구나. 자, 이제 아빠를 만나도 좋다.”

그러나 수리와 사비, 마루가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내려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썸이 나타났다. 골리 쌤은 벌써 썸의 등에 타고 있었다.

“타!”

“쌤, 장난하지 마세요. 이건 다 죽자는 거예요. 썸은 하늘을 나는 익룡이 아니에요. 썸은 초식 공룡이에요. 날지 못한다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썸은 흥흥 하고 콧김을 뿜어냈다.

“천만에. 나는 나는 걸 허락받았어.”

썸의 겨드랑이에서 커다란 날개가 슬금슬금 나왔다.

“우와, 비행기 날개다. 엄청 크다.”

마루가 입을 크게 벌리고 침을 흘렸다.

“타자.”

수리의 허세 가득한 명령에 사비가 반항했다.

“나는 안 타.”

“나도 죽기 싫어. 세상은 넓고 먹을 건 많다.”

마루도 강하게 반항했다. 볼트는 슬그머니 수리의 손을 잡았다.

“이 바보들. 다른 방법이 없잖아? 우리는 아빠를 찾으려고 이곳까지 왔어. 바로 앞에 아빠가 있어. 그런데 그만두자고? 지금은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기 직전이라고. 이 바보들아!”

수리가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다시 차분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숫자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잖아? 그런데 벌써 죽어? 영화 주인공이 죽는 거 봤어? 마지막에 장렬하게 죽을 순 있어도 이건 아니지.”

“맞아, 맞아. 주인공은 안 죽지. 수리 말이 맞아.”

마루는 금방 설득됐다.

“너는 진짜 최강 단순이다. 머리는 왜 있는 거야?”

사비가 마루의 엉덩이를 뻥 차자 마루는 곧바로 썸의 등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수리가 사비와 볼트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 날자!”

“그래, 날아보자!”

수리와 썸이 장단을 맞췄다.

썸은 날개를 움직여 필사적으로 펄럭였지만 중심을 못 잡고, 곧바로 추락했다.

“아악~”

“죽는다.”

“아빠!”

아찔한 순간, 갑자기 공간이 물컹한 물의 대륙으로 바뀌었다. 찰고무와 같은 탄성을 가진 물의 대륙은 썸과 수리, 사비, 마루, 골리 쌤, 볼트를 통통통 튕겨 아래로, 아래로 옮겼다.

아빠가 무사히 도착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과 아빠들은 서로 얼싸안았다.

“아빠, 이제 헤어지지 말아요.”

“이제 우리랑 집으로 돌아가요.”

아빠들은 언제나 그랬듯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수리 아빠가 먼저 말했다.

“그래. 그런데 먼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을 마쳐야 갈 수 있어. 누구든지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니?”

아이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빠를 만났는데 뭐 하러 비밀을 풀어요?”

도발적인 말투로 수리가 대꾸했다.

“수리야. 아빠를 만나기만 하면 너의 책임은 뒷전이란 말이야? 독수리는 왜 높이 날겠니? 과연 먹잇감만을 찾기 위해서일까?”

마루 아빠가 말했다.

“마루야, 너는 진실을 밝히고 싶다는 호기심은 없니? 오로지 먹을 것에만 호기심이 있단 말이니? 그럼 너는 돼지구나. 꿀꿀.”

사비 아빠가 말했다.

“사비야, 우리 붉은 여우. 너는 어려서부터 세상의 모든 역사에 대해 궁금해 했었지. 지금도 그렇겠지?”

아이들은 굳어진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때였다.

“저것 봐, 폴리페서야. 어떻게 들어왔지?”

썸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갔다.

“그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힐라 몬스터에 일이 생긴 게 분명해. 폴리페서는 들어올 수 없단 말이야. 난 돌아갈래. 우리 친구들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게 분명해.”

“빨리 도망가야 하지 않을까?”

그때 모나가 당당하게 말했다.

“도망가다니? 나와 나의 전사들, ‘피스솔저’들은 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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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윤 시인·소설가.
판게아 시리즈 1권 시발바를 찾아서, 2권 마추픽추의 비밀, 3권 플래닛 아틀란티스를 썼다. 소년중앙에 연재하는 ‘롱고롱고의 노래’는 판게아 4번째 시리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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