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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호갱’으로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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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양선희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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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논설위원

이쯤 되면 소비자들을 ‘호갱’ 취급한다고 기업과 정부만 탓할 일은 아닌 듯하다. 소비자들 스스로 ‘호갱 인증’을 제대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불과 4개월 전의 일이었다. 독일 폴크스바겐의 디젤차 배출가스 조작 스캔들로 전 세계가 발칵 뒤집어졌었다. 여론은 들끓었고 소비자들도 이런 기업의 사기는 응징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데 그 이후 우리 시장의 흘러간 사정을 보면 허무하기 짝이 없다. 우리 시장에서 폴크스바겐 디젤차는 스캔들 이전인 지난해 8월 5898대가 팔렸다. 그런데 스캔들이 터진 후인 10월(3111대)에 잠시 주춤했다 11월엔 7585대, 12월에도 5191대로 다시 잘 나갔다. 미국에선 8월엔 8688대였지만 스캔들 이후에는 확확 줄어서 12월엔 76대였다.

 독일에서도 지난해 폴크스바겐 차량 판매량은 전년 대비 4.8%가 줄었다. 포르셰(18.6% 증가) 등이 잘 팔려 전체 그룹 판매는 4.4% 늘었지만 전체 독일 시장 증가율(5.6%)을 밑돌았다. 반면 한국 시장에선 폴크스바겐이 16%, 아우디가 17.7% 증가했다. 할인 정책과 무이자 할부 등의 프로모션에 소비자들이 열광적으로 응답한 결과였다.

 허무해지는 건 또 있다. 지난 스캔들로 높은 연비와 친환경을 모두 잡았다는 ‘클린 디젤’ 신화가 속임수였다는 게 드러났다. 디젤엔진은 질소산화물과 미세먼지를 배출해 환경을 오염시킨다. 미국에서 디젤에 우호적이지 않은 것도 미국엔 분지가 많아 이런 환경오염 물질이 대륙 내에 축적될 수 있다는 위험성 때문이다. 디젤 스캔들은 어떤 기술로도 이런 디젤의 약점을 결코 없앨 수 없다는 민낯을 드러내며 환경에 대한 각성을 촉구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를 계기로 디젤 진영의 몰락이 시작될 것이라고 점쳤다.

 실제로 유럽 여러 나라들부터 디젤 규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영국은 스캔들 직후 디젤차와 관련된 각종 세제 혜택을 없애고 디젤차 폐차 인센티브를 마련하는 등 디젤차 줄이기에 나섰다. 프랑스도 5년 안에 디젤과 휘발유 가격을 같은 수준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스캔들 이후 대부분 국가에서 디젤차 판매는 줄고 있다. 한데 한국 시장에선 거꾸로다. 국내 디젤차 판매도 꾸준하고, 지난해 수입 디젤차 점유율은 68.8%로 2014년(67.8%)보다 늘었다. 각성은 없었다.

 디젤차의 소비자 효율은 높다. 연료 가격도 싸고, 연비도 좋고, 힘도 좋다. 다만 환경에 나쁠 뿐이다. 미세먼지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1급 발암물질이고 요즘 우리나라 환경의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되는 오염물질이다. 전문가들은 지금 한국 대기를 뒤덮은 미세먼지에서 중국 영향은 절반 정도로 본다. 나머지는 국내에서 발생시킨다. 디젤차는 그 주요 발생원이다. 이에 디젤차를 줄이려는 ‘공익적 소비 의식’이 높아져야 한다는 점도 지난해 다 지적됐다. 한데 여론은 들끓어도 소비자들은 반응하지 않는다. 몇 푼의 금전적 이익에 몰입해 범죄 기업에 대한 견제와 응징, 공익적 소비 같은 건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다.

 폴크스바겐 측은 미국에선 CEO가 직접 수차례 사과했고, 고객 1인당 1000달러를 보상했다. 한데 한국에선 무대응이다. 정부의 리콜 명령에 부실한 계획안을 내 형사고발됐고, 리콜을 해도 연비·성능에 문제가 없다며 소비자 보상계획은 내놓지도 않았다. 이에 여론은 “왜 한국 소비자를 호갱 취급하느냐”고 핏대를 올리지만 꿈쩍도 않는다.

 한데 입장 바꿔 생각하면 기업이 범죄를 저질러도 대기 오염물질을 아무리 배출해도 가격만 좀 내리면 소비자들이 열광하며 사주는데 기업이 아쉬운 게 뭐가 있겠나. 소비자가 호갱 취급을 당하지 않으려면 기업 견제와 범죄 기업에 대한 응징, 공익을 위해 사적 이익 일부를 포기하는 높은 소비자 의식 등 만만찮은 소비자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 소비자가 만만해 보이는 한 기업들은 계속 호갱 취급을 하며 뒤통수를 칠 거다.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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