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장 풀린 원유 4위 이란…초유의 ‘역 오일쇼크’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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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원유 매장량은 1580억 배럴에 달한다. 매장량 기준으로 세계 4위다. 이런 이란이 원유 수출을 다시 시작하는 시점이 절묘하다. 국제유가 하강곡선이 급격해진 시기여서다.

“유가 10달러대로 떨어질 수도?
석유개발 투자 1200조 부실 우려
금융시장 → 실물경제 연쇄 불안
80년대 저유가 시대와 정반대 현상
제재 해제 직전 미국 등 주가 하락

1980년대 3저 호황(저금리·저유가·저달러)의 조건 가운데 저금리·저유가는 이미 실현됐다. 종전 공식대로라면 소비 증가와 경제 활성화를 기대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주 말 미국·중국·한국 등 주요국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17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가 하락으로) 시장 참여자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73년과 79년 유가 급등으로 야기된 석유파동과 비슷한 풍경이 오히려 저유가 시대에 펼쳐지고 있다.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가 말한 ‘역(逆)석유파동(Reverse Oil Shock)’ 현상이다.

 루비니는 최근 보고서에서 “저유가가 금융 영역에서 세 가지 불안(disorder)을 야기한다”고 했다. 디플레이션 악화, 주식과 채권 시장 불안이 그것이다. 그의 말은 이미 이뤄지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의 물가 상승률이 연 2%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주식시장에선 에너지 기업 등의 주가가 추락했다. 여기에다 JP모건과 씨티그룹 등 미 대형 금융그룹이 셰일에너지 회사 등에 돈을 꿔줬다가 떼인 건수가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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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유 가격 급등기(수퍼 사이클: 2000~2008년)에 집중된 석유개발 투자에서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고 있어서다. 미 투자은행 골드먼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1조 달러(약 1200조원)에 가까운 석유개발 투자가 부실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추정이지만 규모가 심상찮다.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발단은 3000억 달러 정도 부실이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중국의 경제 성장을 근거로 수퍼사이클 시대에 국제유가 고공 행진이 영원할 것이란 기대감에 막대한 돈이 원유 개발 등에 몰려들었다”고 했다.

 여기엔 2004년 전후 본격화한 원유 투자의 대중화가 한몫했다. 이전에 원유투자는 힐러리 클린턴 같은 사람도 쉽게 엄두 내지 못했다. 그는 남편인 빌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였던 80년대 원유 투자를 시도한 적이 있다. 힐러리는 “투자해야 할 금액이 너무 많아 포기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새 방법이 생겼다. 원유 펀드 투자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결제은행(BIS) 등은 “개인투자자들은 2004년 전후로 원유 펀드 투자에 나섰다”고 전했다. 요즘 미국인 등이 유가하락을 마냥 반길 수 없는 까닭이다.

 이제 모든 상황이 역회전하고 있다. 수퍼 사이클의 대전제였던 중국 경제가 둔화하고 있다. 설령 중국 경제가 회복된다 해도 성장률이 고도성장기 수준까지로 올라갈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중국 경제 회복 기대감에 국제유가가 다시 오른다고 해도 원유투자의 손익분기점까지 상승할 가능성은 미지수”라고 했다.

 손익분기점이 얼마이기에 그럴까. 골드먼삭스는 “배럴당 70달러”라고 했다. 국제유가가 이 가격 이하면 각종 원유투자 펀드의 손실이 불어난다는 뜻이다.

이미 두바이유와 서부텍사스유가 배럴당 20달러대로 떨어졌다. 스탠다드차타드는 원유 가격이 배럴당 10달러대로 떨어질 수 있다고 예측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유가 하락은 투자 손실과 주가 하락을 부르고 실물 경제 발목을 잡는다. 투자 수익이 줄어든 중산층이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올해 세계 경제의 화두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기준 금리 추가 인상 시점도 늦춰질 전망이다. 글로벌 선물시장에선 미 기준금리 인상 시점을 9월 이후로 보고 베팅하고 있다. 이달 초까지는 3월 인상 전망이 많았다.

 세계 금융시장은 가보지 않은 길을 경험하고 있다. 80년대와 90년대 저유가 시대와는 정반대 현상이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당시는 ‘저유가→실물 경제 활성화’ 메커니즘이 작동했다. 지금은 아니다. ‘저유가→금융시장 불안→실물 경제 악영향’이란 새 경로가 나타나고 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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