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오일쇼크 시대…세계 금융시장 가보지 않은 길을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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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원유 수출을 다시 시작하는 시점이 절묘하다. 국제유가가 이미 추락하는 시기여서다. 1980년대 3저 호황(저금리·저유가·저달러)의 조건 가운데 저금리·저유가는 이미 실현됐다. 종전 공식대로라면 소비 증가와 경제 활성화를 기대해도 될 성싶다. 하지만 지난주 말 미국 등 주요국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17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가 하락으로) 시장 참여자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73년과 79년 유가 급등으로 야기된 석유파동과 비슷한 풍경이 현재의 저유가 시대에 펼쳐지고 있다.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가 말한 ‘역 석유파동(Reverse Oil Shock)’ 현상이다.

루비니는 최근 보고서에서 “저유가가 금융영역에서 세 가지 불안(disorder)을 야기한다”고 했다. 디플레이션 악화에다 주식과 채권 시장 불안정을 저유가가 유발한다는 얘기다. 그의 말은 이미 이뤄지고 있다. 미국 등의 물가 상승률이 연 2%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주식시장에선 에너지 기업 등의 주가가 추락했다. 여기에다 JP모건과 씨티그룹 등 미 대형 금융그룹이 셰일에너지 회사 등에 돈을 꿔줬다가 받지 못한 건수가 속출하고 있다.

루비니는 “국제원유 가격 추락이 낳은 파장이 버블 붕괴에 따른 금융 불안과 닮았다”고 했다. 실제 원유 가격 급등기(수퍼 사이클: 2000~2008년)에 석유개발에 투자가 집중됐다. 미 투자은행 골드먼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1조 달러(약 1200조원)에 가까운 석유개발 투자가 부실화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추정이지만 규모가 심상찮다. 서브프라임(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의 발단은 3000억 달러 정도 부실이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중국의 경제 성장을 근거로 수퍼사이클 시대에 국제유가 고공 행진이 영원할 것이란 기대감에 막대한 돈이 원유 개발 등에 몰려들었다”고 했다.

여기엔 2004년 전후 본격화한 원유 투자의 대중화가 한 몫 했다. 이전에 원유투자는 힐러리 클린턴 같은 사람도 쉽게 엄두 내지 못했다. 그는 남편인 빌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였던 1980년대 원유 투자를 시도한 적이 있다. 힐러리는 “투자해야 할 금액이 너무 많아 포기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새 방법이 생겼다. 원유 펀드 투자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결제은행(BIS) 등은 “개인 투자자들은 2004년 전후로 원유 펀드 투자에 나섰다”고 전했다. 요즘 미국인 등이 유가하락을 마냥 반길 수 없는 까닭이다.

이제 모든 상황이 역회전하고 있다. 수퍼 사이클의 대전제였던 중국 경제가 둔화하고 있다. 설령 중국 경제가 회복된다 해도 성장률이 고도성장기 수준까지로 올라갈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중국 경제 회복 기대감에 국제유가가 다시 오른다고 해도 원유투자의 손익분기점까지 상승할 가능성은 미지수"라고 했다.

손익분기점이 얼마이기에 그럴까. 골드먼삭스는 “배럴당 70달러”라고 했다. 국제유가가 이 가격 이하면 각종 원유투자 펀드의 손실이 불어난다.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칠 수밖에 없다.

유가 하락은 투자 손실과 주가 하락을 부르고 실물 경제 발목을 잡는다. 투자 수익이 줄어든 중산층이 소비 를 줄일 수밖에 없어서다. 올해 세계 경제의 화두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기준 금리 추가 인상 시점도 늦춰질 전망이다. 요즘 글로벌 선물시장에선 미 기준금리 인상을 9월 이후로 보고 베팅하고 있다. 인상확률이 9월21일 공개시장정책위원회(FOMC) 회의 이후부터 기준치인 50%를 웃돌고 있다. 이달 초까지는 3월 인상확률이 50.8%였다.

세계 금융시장은 가보지 않은 길을 경험하고 있다. 1980년대와 90년대 저유가 시대와는 정반대 현상이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당시는 '저유가→실물 경제 활성화' 메커니즘이 작동했다. 지금은 아니다. '저유가→금융시장 불안→실물 경제 악영향'이란 경로가 새로 나타나고 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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