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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속으로] 미혼모 아이 6명 매매해 키우다…23세 임씨 '기구한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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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낳은 아이를 베이비박스에 몰래 버리거나, 심지어 쓰레기 통에 버려 죽이는 비정한 미혼모들이 적지 않게 뉴스가 되는 세상이다.

얼마전 충남 논산에서는 20대 미혼 여성 임모(23)씨가 다른 미혼모들이 버린 아이 6명(2명은 미혼모가 원해 다시 돌려줬고 4명은 계속 키움)을 거둬 키우다 구속된 사건이 있었다. 소액의 병원비를 지불한 것이 아동복지법 위반(아동매매)에 저촉됐다는 이유였다.

법에 대한 무지 탓이든 다른 의도가 있었든 어쨌든 실정법 위반이니 처벌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가 사건 발생 초기에 우세했고 임씨는 곧바로 구속됐다.

하지만 경찰의 추후 정밀 조사를 통해 임씨는 아이를 학대하지도 않았고, 할머니·아버지·남동생·고모 까지 달려들어 비교적 건강하게 키워왔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동정론이 일고 있다.

법원의 형식적인 법 적용에 따라 임씨와 아이들은 현재 물리적으로 분리된 상태다.

이번 사건을 수사해온 논산경찰서의 범죄행동분석(프로파일링), 본지의 임씨 친척과 이웃의 증언 취재를 종합해 이 사건을 임씨의 경험을 토대로 재구성해 봤다.

난 엄마를 일찍 여의었지만 나도 엄마가 되고 싶다.

아홉 살 때 엄마와 헤어졌다. 영영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운동회·소풍 때 엄마 대신 할머니가 왔다. 친구들이 “쟤는 엄마가 없대요”라며 놀렸다. 맞설 힘이 내겐 없었다. 그렇게 사춘기가 지났다. 낯선 곳인 논산으로 이사를 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취직자리도 얻지 못했다. 가족이 있지만 늘 외로웠다. 결혼은 엄두도 못 냈다. 아이를 낳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대신 개와 고양이를 길렀다. 무엇인가를 보살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TV에서 미혼모들의 사연이 나왔다. 남몰래 버려지는 아이도 많다고 했다. 내가 키울 수 있는데, 내가 대신 엄마가 돼 줄 수 있는데….

절박한 미혼모에게 접근했다.

2014년 8월. 인터넷 포털 검색창에 ‘미혼모’를 검색했다.

17~18살짜리 미혼모들이 아이를 데려갈 사람을 찾고 있었다. 학교를 그만두거나 집을 나와야할 처지였다. 손을 내밀면 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경북 구미에 사는 10대 후반의 미혼모에게 쪽지를 보냈다. “내가 키워주겠다”고 했다.

구미로 가서 치료비를 하라며 60만원을 쥐어줬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여자아이를 데려왔다.

덜컥 겁이 났다.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어서였다.

대구에 사는 고모가 생각났다. 한 달 뒤 고모의 호적에 아이를 올렸다. 고모에게 보낸 아이가 눈에 아른거렸다. 보냈으니 데려올 수도 없다.

다시 인터넷을 켰다.

이번엔 논산과 가까운 대전이었다. 3개월 된 여자아이였다.

아이 엄마에게 “잘 키워주겠다”고 해줬지만 눈시울을 붉히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내가 키우게 된 첫 번째 아이다.

혼자면 외로울 것 같다.

한 달 뒤인 2014년 10월 이번엔 인천에 사는 18살짜리 미혼모에게 쪽지를 보냈다.

출생신고를 한지 8개월 된 이씨 성의 남자아이를 키우던 여학생이었다.

아이를 키우는 게 이렇게 즐거운 것인 줄 몰랐다. 한 명 더 데려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버지와 남동생도 “같이 키워줄 테니 괜찮다”고 했다.

평택에서 데려온 남자아이까지 자식이 셋으로 늘었다.

힘들지만 나도 이젠 엄마다.

2015년 5월. 고모와 사촌동생 손을 붙잡고 동사무소로 갔다. 출생신고를 했다. 이름은 내 성을 따서 ‘임OO’로 지었다.

이제 진짜로 엄마가 됐다.

한 달에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65만원. 아버지와 남동생이 보태는 돈을 합쳐도 아이 셋을 키우기엔 부족하다.

고모와 삼촌에게 손을 벌리기도 미안하다. 그분들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매일 나가지는 못하지만 한 푼이라도 벌려면 아이들과 떨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대신 아버지가 아이들을 봐주기로 했다. 좋아하는 술도 끊는다고 하신다.

아이들을 보면 힘이 난다. 얼마 있으면 “엄마”라고 부를 것 같다.

집을 옮겼다. 17평짜리 작은 곳이지만 아이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3층짜리 연립주택이다.

봄바람이 분다.

아이 하나는 업고 하나는 앞에 메고 동네 마실을 나왔다.

수퍼 할머니가 “아기가 엄마 닮아 이쁘네”라고 칭찬했다.

그날은 기쁨에 꼬박 날을 샜다.

경찰이 주변을 맴돈다. 불안하다.

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가끔 집에 들르는 아줌마가 우리 가족을 수상하게 여기는 눈치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셋이나 있어서다.

뭔가를 자꾸 캐묻는다.

며칠 전엔 경찰이 찾아왔다.

아빠가 누구냐, 출생신고를 어떻게 했느냐고 추궁한다.

겁이 났다.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기(대구)로 가면 안돼?” 더위가 한창인 8월 보따리를 싸서 대구로 도망갔다. 급하게 오느라 옷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다. 논산 집에는 에어컨도 있는데 대구 삼촌 집은 찜통이다.

아이들이 걱정이다.

그사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벌써 다섯 달째다.

경찰에 들킬까봐 바깥 출입도 못했다. 방은 따뜻하지만 갈아 입힐 내복이 부족하다. 논산 집으로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경찰이 들이닥쳤다. 이젠 헤어질지도 모른다.

2016년 1월 4일.

‘똑~똑’.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린다.

불길하다.

문을 열자마자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덜컥 주저앉았다. 뭐라 변명할 틈도 없었다.

그게 아이들과 마지막이었다.

논산으로 오는 내내 눈물이 났다. 감옥에 가는 것도, 조사를 받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학교도 보내고 시집·장가도 보내고 싶었다.

이제 겨우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을 어떤가요?” 잠을 이룰 수 없다.

“왜 그랬습니까?” 형사의 다그침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좋아서 그랬다”고 몇 번이나 답했지만 그게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아이들을 돈벌이 목적으로 데려온 게 아니냐"고 추궁하는데 숨이 턱 막혔다.

아이들은 어디에 있는지 물었더니 “위탁기관에 맡겼다. 건강하니 걱정하지 마라”는 말만 되풀이 한다.

'OO이는 낯을 많이 가려 내가 직접 기저귀를 갈아주고 옷도 입혀야 하는데….'

하루가 한 달 같다.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아이들이 밥은 잘 먹고 있나” 물어봐도 모른다는 말만 들었다. 면회를 오는 아버지와 동생, 고모도 그날 이후로 아이들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재판에 넘겨지면 엄마 자격을 잃게 된다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판사님께 빌어볼까.

“친 엄마는 아니지만 친엄마보다 더 잘 키우겠다. 아이들을 돌려달라”고 호소라도 해볼까.

지금 내 처지에서는 아이들이 행복하길 기도하는 수밖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법을 잘 몰라 제대로 더 따져보지 못한 채 법을 어기게 된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

논산=신진호 기자 shin.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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