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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이슬람·기독교 문명 ‘취안저우 용광로’에 녹아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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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호 6 면

취안저우(泉州) 금채산에 위치한 육승탑(六勝塔)이 현대화된 컨테이너항을 향해 서 있다. 목조건축을 모방한 송나라 시대의 5층 석탑으로 당시 동남아는 물론 인도·아라비아와 교역하던 무역선들을 위한 등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취안저우=김춘식 기자

지난해 12월 5일 취재팀은 푸젠(福建)성 동남부에 위치한 취안저우(泉州)에 닿았다. 개인적으론 7년 만의 방문이다. 이곳은 시진핑(習近平) 정부가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 정책의 출발지로 명명한 곳이다. 오래전부터 ‘해양 실크로드 1번지’였던 인연 때문이다. 지금은 상하이(上海) 등지에 영광을 넘겨주었지만 송(宋)대 때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큰 해항의 하나로 꼽혔던 곳이다. ‘아라비아 최고의 여행기’로 불리는 모로코 출신의 이븐 바투타(Ibn Battuta·1304~1368)의 여행기에도 취안저우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항구는 세계 대항의 하나. 어찌 보면 가장 큰 항구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서 약 100척의 대형 정크를 보았다.”


“소형 정크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는 대목을 떠올리며 항구에 배들이 빼곡하게 들어찼을 활기찬 당시 모습을 상상해본다. 물동량이 많았고 국제 인적 교류의 중심이었으니 ‘바다의 비단길’이 열리는 시작점으로 치는 데 손색이 없다. 당시 외국인은 취안저우를 자이툰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이툰은 올리브 나무란 뜻이다. 올리브가 없는 도시에서 그런 명칭을 붙였다니, 글로벌 국제도시의 감각을 갖춘 작명법 아닌가. 『동방견문록』엔 몽골 공주 코카친의 여행 안내자로 선발된 마르코 폴로 일행이 취안저우를 출발해 말레이시아·스리랑카 등을 경유해 이란의 호르무즈에 도착하는 장면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청정사 인근의 도교 사원에서 중국인들이 소원을 빌고 있다.

배의 형상을 한 초석 위에 세워진 낙양교

무슬림 상인이 지중해로 비단 수출당시엔 취안저우에서 점성(베트남 다낭 부근)-자바(인도네시아)-필리핀으로 이어지는 해상 항로가 있었다. 인도와 아라비아로 빈번하게 무역선이 오갔으며 무슬림 상인에 의해 비단과 도자기·차가 지중해 지역으로 수출됐다. 북상 루트를 통해선 취안저우-고려-일본으로도 연결됐다. 그만큼 취안저우는 당대 세계의 ‘중심’이었다.


취재진은 취안저우 시내에 있는 청정사(淸淨寺)부터 찾았다. 북송시대(1009)에 건립된 가장 오래된 이슬람 사원으로, 중국 10대 명찰 반열에 오른 문화유산이다. 중세 무슬림 건축양식인데 옛 아랍어 비문과 돌기둥·돌벽이 전해온다. 이븐 바투타도 “무슬림은 특정 구역에 살고 있다. 이곳 상인들은 이교도 지역에서 살고 있어서인지 무슬림이 오기만 하면 이슬람 땅에서 왔다면서 더없이 반가워했다”고 기록했다.


영산(靈山)에는 무함마드가 보냈다는 4명의 이슬람 현자들의 무덤이 있다. 현자들이 현지에서 죽자 엄중히 장사 지내 명산에 모신 것이다. 명(明)대의 정화(鄭和·1371~1433)가 원정 가면서 향을 피웠다는 기념비(鄭和行香碑)도 남아 있다. 서역에서 이주해온 무슬림 출신인 정화가 다시 ‘무슬림의 바다’로 떠나가면서 향을 올렸던 곳이다. 출항을 앞둔 정화는 ‘알라여, 부디 신의 가호를…’이라고 빌지 않았을까.


취재진의 탐사 루트는 해외교통사박물관으로 이어졌다. 실크로드 박물관이라고 명명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컬렉션의 질과 양이 완벽에 가깝다. 이슬람 석각은 물론이고 마니교·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교의 중국말) 묘비명이 즐비하다. 시리아와 파스파 문자도 보인다. 연화문과 십자가가 동서 융합의 묘한 미학을 연출하고 있다. 힌두 신들 가운데 가장 자비롭고 선한 신으로 불리는 비슈누상 등 다양한 힌두문명의 자취도 보인다. “원나라 때(1229년) 페르시아 호르무즈에 사신을 파견했다”고 적힌 석각이 취재진의 눈길을 끈다. 페르시아 사절이 취안저우에서 출발했다가 귀환했음을 알 수 있는 유물이다. 불교는 물론 힌두교·이슬람·기독교 등 이교도가 한데 어우러져 살게 하는 융합의 힘은 해양 실크로드가 가져다준 ‘선물’이다.


박물관에서는 마침 해양 실크로드 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푸젠성·장쑤성·저장성·산둥성·광둥성·광시성·하이난성이 연합해 기획한 전시회다. 시진핑 주석이 추진하는 해양 실크로드를 통한 ‘해양 굴기(?起)’ 의지의 강렬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해양 실크로드 문명의 융합성을 잘 보여주는 두 번째 코스는 천년고찰 개원사(開元寺). 경내에 세워진 쌍탑이 위엄스럽다. 취안저우의 대표 사원이다. 힌두 양식이 들어와 있는 절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가보니 온통 중국식 절로 변모돼 있었다. 찾고 찾아서 겨우 돌기둥에서 힌두 양식의 문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돌기둥에 시바상·코끼리상 같은 인도 불교의 강력한 흔적이 각인돼 있다.


취안저우는 송대 이후 최대의 무역항으로 급부상했다. 수출품은 비단·도자기·문방구 등 광범위했지만 이 중 단연 도자기가 으뜸이었다. 동남아시아·인도는 물론이고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까지 도자기를 수출했다. 원(元)대에 들어와선 취안저우 상인이 아라비아반도, 페르시아만, 아프리카 동부와 인도대륙, 동남아 일대로 진출했다. 해상무역이 번성했던 남송(南宋) 시대 조여괄(趙汝适)이 지은 지리서 『제번지(諸蕃志)』엔 “대식인(大食人) 들이 취안저우 서북에 산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식인은 아랍인을 뜻하는 말로 당시 아라비아 상인을 비롯해 각지에서 흘러들어온 무슬림 상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돼 있었음을 환기시킨다. 훗날 명(明)에 의해 바닷길을 통제하는, 이른바 ‘해금(海禁)’ 정책이 시작되기 전까지 송·원대 취안저우는 글로벌 해양문화가 꽃피웠던 중심지였다.


취안저우를 제대로 보려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낙양교(洛陽橋·1059년 건축)다. 옛 수도 낙양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살았다고 해서 낙양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천년 돌다리의 위엄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다리의 길이는 800m에 달한다. 1000여 년 전에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돌다리를 놓은 중국의 ‘괴력’은 세계 교량사의 명품 반열에 낙양교를 올려놓고 있다. 원대에 건설된 토목공사의 엄청난 규모를 실감할 수 있는 또 다른 현장은 역시 취안저우에 있는 안평교(安平橋·1151년)로 길이가 무려 2500m에 달한다.

샤먼 해안가에 ‘하나의 나라, 두 개의 체제 통일중국’이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건너편이 대만 진먼도다.

유학생 등 집단거주 신라촌·고려촌도 있어취안저우를 떠나기 전 쿠이샤강(奎霞港)을 찾았다. 개칭되기 전 명칭은 가오리강(高麗港?고려항). 고려 예성강의 벽란포와 거래하던 무역선이 오가던 항구다.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닝보(寧波)에서 출발해 흑산도와 고군산열도, 당대 국제무역항이던 벽란포를 거쳐 개경까지 오갔던 사실이 그가 남긴 『고려도경』에 전해오고 있다. 취안저우에는 유학생·상인·승려 등이 집단거주했던 신라촌과 고려촌, 심지어 신라소학교까지 있다. 수입 인삼 명칭인 ‘신라삼’ 도 전해온다. 당나라 말 선종 고승 설봉선사의 제자인 신라인 현눌선사의 족적도 그에게 봉헌된 복청사(福淸寺)에 남아 있다.


남중국해 탐사의 마지막 여정은 샤먼(厦門). 앞서 들렀던 푸저우와 취안저우가 고전적 도시라면 샤먼은 상대적으로 갓 태어난 도시다. 완연한 서구풍이고 야자수 우거진 남양풍이다. 아편전쟁 후 유럽 열강은 샤먼을 주목했다. 샤먼의 부속섬 구랑위(鼓浪嶼)엔 13개국의 공동 조계(租界)가 들어섰다. 좁은 섬에 밀집대형으로 건축해 높은 정상에서 해안이 굽어 보이게 배치했다. 풍토병을 피하고 방어 관측에도 유리한 정상을 선호한 식민지 건축의 일반 법칙에서 구랑위도 예외가 아니다. 1920~30년대에는 그 건축물 숫자가 1000채를 넘어섰다는 기록이 있다. 영사관·무역회사·살림집 등 각양각색의 식민지 건축양식-. 완벽한 서구풍이 있는가 하면 중국풍·서양풍이 뒤섞인 것들도 눈에 띈다. 구랑위를 ‘세계 건축박물관’이라 부르는데 틀린 말이 아님을 실감한다.


남방식물로 사계절 정원을 수놓은 서구식 정원을 보려는 관광객이 전국에서 몰려든다. 좁은 골목을 올라가거나 순환도로를 거닐면서 서구 열강이 남긴 이국적 풍경에 연신 카메라를 들이댄다. 구랑위 언덕을 오르자 피아노박물관이 나타난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풍금 소리가 들려온 섬이기에 오늘의 박물관이 만들어졌다.

구랑위 동북쪽 대형 바위 위에 서 있는 정성공(鄭成功)의 동상. 정성공은 네덜란드로부터 대만을 되찾은 중국 명·청 왕조 교체기의 영웅이다.

구랑위 동북쪽 곶에는 정성공(鄭成功· 1624~1662) 장군의 동상이 해협을 바라보며 밤마다 불을 밝힌다. 반청존명(反淸尊明)의 기치를 들고 멸망한 명조 황가의 자손을 옹립하는 등 명의 부흥을 꾀했던 인물이다. 정성공은 당시 대만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인을 몰아내고 대만 섬을 수복해 중국에 복속시킨 장수다. 열강 세력이 물밀듯 들어오던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시대, 그는 대만·진먼(金門)·샤먼 일대의 해상을 주름잡았다. 영국의 작가 조너선 클레멘츠는 『해적왕 정성공』이란 책에서 그를 “중국의 아들, 대만의 아버지”라 칭했다.


곳곳에서 ‘정성공 영웅 만들기’가 한창이다. 한(漢)족의 나라이던 명(明)에 충성하고 외세를 물리친 ‘원조 대만인’인 정성공은 대국굴기의 아이콘이다.


샤먼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멀리 진먼섬이 내려다보이는 샤먼 해변엔 거대한 입간판이 돌출돼 있다. ‘一國兩制 統一中國’(하나의 나라, 두 개의 체제, 통일 중국). 샤먼 화교박물관 입구에는 이런 글씨도 각인돼 있다. 광저우 출신으로 변법자강 운동을 펼쳤던 중국의 사상가이자 정치가 캉유웨이(康有爲·1858~1927)가 쓴 글이다.


‘조국을 잊지 마세요(故國勿忘)’.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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