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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만권 간직한 헌책방 골목, 현대사 ‘문화유산’ 지정돼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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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호 26면

1 6·25전쟁의 와중에서 탄생한 보수동 책방골목은 한국 현대사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됨 직하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총을 든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워 경남도청과 부산시청을 비롯하여 거리와 관공서 요소요소를 지키고 있었다. 저 낙동강변 모래바람 불어오는 흙바닥 교실에서 중학교를 마친 나는 부산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우리는 매일 운동장에서 거행되는 조회 때마다 선생님들과 함께 군인들이 내세운 ‘혁명공약’을 낭독했다.


그 해 봄날 나는 부산의 보수동 책방골목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다. 수많은 책방에 책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한 농촌 소년에게 보수동 책방골목의 풍경이란 경이로움 그것이었다.


올해로 나는 책 만들기 40년을 맞았다. 책을 만들면서, 한 권의 책을 나름 잘 만들기 위해 나는 탐서여행을 해오고 있다. 세계의 서점과 도서관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우리 시대가 더불어 만들어낸 우리 책들을 새롭게 탐험하고 있는 중이다.


 북에서 피란 와 문 연 보문서점이 효시 1950년 6·25전쟁으로 이 강토는 쑥대밭이 되었다. 200만 명이 부산으로 피란 왔다. 부산은 1023일간 임시수도가 되었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민족상잔의 고단한 역정에서 탄생했다. 피란 시절 지금은 복개된 보수천변과 보수동 뒷산에 피란민들이 밀집했다. 하천에 판자로 수상가옥을 지었다. 판잣집들이 보수동 뒷산 꼭대기까지 빽빽하게 이어졌다. 서울에서 피란 온 오산중고와 청구중, 서울사대 부속중고 등이 보수동 뒷산에 천막교실을 꾸려 수업을 진행했다. 전시연합대학이 자리 잡았다.


보수동은 전쟁 중에도 공부하기를 멈추지 않은 학생들의 통학로였다. 경남중고와 부산여고가 가까이에 있었다. 이 골목에 북에서 피란 온 손정린씨(작고)가 책 난전을 펼쳤다. ‘보문서점’의 시작이었고 책방골목의 효시였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헌책과 잡지와 만화, 피란민과 학생들이 읽던 책과 교과서를 모아 팔기 시작했다. 또 다른 서점들이 들어섰다.

1953년 이후 보수동 책방골목을 지키고 있는 학우서림의 김여만 옹.

1953년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책 팔기를 시작해 오늘도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학우서림의 김여만(82)옹은 그 옛날의 풍경을 증언한다.


“지금의 광일초등학교에 들어 있던 육군병원 덕분에 우리 책방골목의 존재가 전국으로 알려졌지. 부상당한 군인들이 이곳으로 후송됐고, 각지에서 부모형제들이 면회를 왔지.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이곳을 보고 보수동에 가면 못 구하는 책이 없다고 했거든.”


노점책방 6~7곳으로 시작된 보수동 책방골목엔 이내 30여 곳으로 서점이 늘어났다.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미군과 연합군이 북진하면서 읽던 책들을 버리고 떠났다. 그걸 모아오는 수집상들이 생겨났다.

2 보수동 책방골목의 서점들이 갖고 있는 책은 400여만 권으로 추산된다. 1950년대 이후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모든 책을 거의 구할 수 있다.


가난한 학생에게 지식·정보의 수원지보수동 책방골목은 1960~70년대에 전성기를 맞는다.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헌 교과서와 헌 참고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이 땅의 가난한 학생들에겐 지식과 정보의 수원지 같은 곳이었다. 70년대엔 100여개의 책방이 운집했다.

주소 부산광역시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 1가 전화 051-244-9668 홈페이지 www.bosubook.com

1960년대와 70년대 보수동 책방골목의 번성은 이 땅의 출판문화 발전과도 일정하게 연계된다.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정진숙의 을유문화사와 조상원의 현암사가 창립되었다. ‘우리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종익의 신구문화사와 박상연의 박우사 같은 출판사들이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권으로 구성되는 기획출판을 시작했다. 신구문화사는 63년부터 『세계전후문학전집』과 『전후한국문학전집』을 펴내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과 최영해의 정음사가 펴낸 『세계문학전집』과는 또 다른 문학전집이었다. 박우사는 61년에 『현대인 강좌』, 63년에 『인물한국사』를 펴내 역시 명성을 떨쳤다. 을유문화사가 68년부터 펴낸 『세계사상교양전집』 전 39권은 한국 출판문화의 한 이정표가 되었다. 현암사는 63년에 『한국의 명저』를, 73년에 『육당 최남선 전집』을 펴냈다. 73년 신구문화사는 『한용운 전집』을, 김성재의 일지사는 『조지훈 전집』을 펴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는 64년부터 72년까지 9년에 걸쳐 『한국문화사대계』를 펴냈다. 여기에 한만년의 일조각이 한국사·한국학 출판에 주력한다. 이 기획들은 바로 보수동 책방골목의 에너지가 되었다. 60년대와 70년대에 창출된 우리 출판의 성과는 지금 대우서점·우리글방·고서·충남서점 등에 당당하게 비치되어 있다.


나는 60년대 초반 고교시절 보수동 책방골목에 갈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책방들을 순례하면서 책을 뒤적거려도 책방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뭐라 하지 않았다. 60년대 중반 대학시절엔 청계천 책방들에 가서, 그 많은 책 속에서 책을 체험할 수 있었다. 보수동 책방들은 지금도 50여 곳이 어깨동무하고 영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많던 청계천 책방들은 어디로 갔는가.


70년대에 나는 인사동의 고서점들을 들락거릴 수 있어서 좋았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한국독립운동사 사료집』 한 세트를 구입하곤 즐거워했다. 그 고서점들도 다 사라졌다. 지금은 이겸노 선생의 책 정신이 계승되고 있는 통문관 하나만이 인사동을 외롭게 지키고 있다.


경소단박(輕少短薄)한 디지털 문명에 자신을 통째로 내맡기는 현대인들의 절제 못하는 삶의 양태 속에서도 보수동 책방골목이 건재하고 있음에 나는 감격한다. 변함없는 종이책의 존엄과 미학을 보전하면서 헌책의 가치를 지키는 선인(善人)들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고향을 지키시던 어머니의 손을 잡고는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어머니의 두 손은 돌덩이같이 단단했다. 평생을 농사일에 매달린 어머니의 손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수동 책방골목을 지키는 서점인들의 손도 어머니의 손처럼 거칠다. 헌책을 돌보는 손은 성하지 않을 것이고 무거운 종이 책을 다루어야 하기에 허리는 편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책 만드는 일은 농사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책방 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건재한 보수동의 책방골목은 우리 현대사의 한 문화유산이다. 우리의 삶을 일으켜 세운 정신과 지혜의 공급원 보수동 책방골목은 당연히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야 한다.


 “모든 새 책 탄생은 헌책으로 가능”지난 2013년 7월 22일에 나는 보수동 책방골목의 의미를 살펴보는 모임을 기획한 적이 있다. 출판도시문화재단이 보수동 서점인들과 의논해서,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사적 의미 새롭게 인식하기, 어떻게 잘 보존하고 키워낼 것인가’라는 주제로 서울과 부산의 문화인과 관계자들이 토론을 벌였다. 행사는 문옥희씨가 이끄는 우리글방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서 진행되었는데 부산과 서울에서 40여 명이 참석했다. 이를 계기로 부산의 독서가들이 ‘보수동 책방골목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발족했다. 그때 나는 나의 ‘책사진’ 20여 점을 우리글방 서가에 거는 전시를 했다. 책의 존엄, 책의 미학을 말하고 싶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 바치는 나의 작은 ‘헌사’를 전시 팸플릿에 올렸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제 삶의 행로에 늘 그리운 풍경으로 저만치 서 있습니다. 다시 가고 싶은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한 권의 책을 만드는 한 출판인의 살아 있는 고향의 뒤뜰 같은 기억으로 다가옵니다. 모든 책은 궁극으로 헌책들입니다. 모든 새 책의 탄생은 헌책으로 가능합니다.”


2011년 파주북소리를 시작하면서 나는 보수동 책방골목의 ‘고서’ 양수성 대표에게 그가 갖고 있는 고서를 전시해보자 했다. 나는 이 전시에 출품된 한글학회의 『큰사전』 전 6권을 구입했다. 일제의 우리말글 말살정책 속에서도 선현들은 감옥행을 마다 않고 우리말글을 지켰다. 수난을 견디면서 1948년에 출간된 『큰사전』은 그 이름만 들어도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우리말 우리글은 책 만드는 나의 삶에 절대적인 주제다. 이오덕 선생의 『우리글 바로쓰기』 『우리문장 바로쓰기』 같은 책들을 펴내는 것도 당연히 내가 해내야 하는 일이다. 이미 갖고 있는 『큰사전』이지만 하나 더 갖고 싶었다. 피란 시절 보수동 책방골목에 자주 드나들었던 최현배 선생이 1937년에 펴낸 『우리말본』도 함께 구입했다.


우리글방의 문옥희 대표는 신구문화사가 1966년에 출간한 이병기 선생의 『가람문선』을 나에게 선물했다. 그 머리말에서 가람 선생은 “송뢰(松?)를 벗 삼는다”고 했다. 고향의 소나무 숲이 한겨울에 들려주던 ‘송뢰’는 그 어떤 합창보다 우렁찼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울창한 책들의 합창소리가 나에겐 송뢰같이 들린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이 땅의 젊은이들은 고단한 정치 현실 속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오늘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책과 함께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모색했다. 1979년 박정희의 유신 권위주의를 몰락시킨 10·26정변의 한 계기가 된 부마항쟁도 책 읽는 젊은이들의 각성과 일정한 연관을 맺고 있다. 70년대 후반 전국에서 전개된 ‘양서협동조합운동’도 그 일환이었다. 1977년에 시작된 부산양서협동조합이 직영한 협동서점이 보수동에 둥지를 틀었고, 거기에서 토론연구 모임이 진행되었다는 사실도 보수동 책방골목이 오늘 우리들에게 건네는 메시지의 일단일 것이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서점들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책은 400여만 권으로 추산된다. 책방마다 개별 창고를 갖고 있기에, 겉에서 볼 수 있는 책방의 모습보다 사실은 훨씬 깊숙이 자리 잡은 콘텐트다. 보수동 책방골목에 와서 뒤지면 어떤 책이든 만날 수 있다. 『한국문화사대계』 같은 기념비적인 책부터 이병주의 『지리산』, 최명희의 『혼불』,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박태순의 『국토와 민중』도 있다. 해방공간에서 간행된 임화와 정지용의 시집, 조지훈·박두진·박목월의 『청록집』도 찾을 수 있다. 80년대에 치열하게 출간된 사회과학책들, ‘금서’가 됨으로써 ‘시대의 명저’가 된 책들도 발견할 수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 입구의 서점인 조각.

보수동 책방골목엔 학우서림 말고도 대동서점·단골서점·신천지·서울서점이 60년이 되어가고 있다. 문화사적 가치도 인식되고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관이 2010년에 개관됐다. 부산시의 지원을 받아 해마다 보수동 책방골목 문화제가 열린다. 외국의 책 매니어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부산영화제가 열리면 찾는 외국인들이 늘어난다. 서울에서 KTX를 타고 찾아온다. 1년에 50만 명이 방문한다. 카페와 갤러리도 문 열고 있다. 변하는 세상과 함께 보수동 책방골목도 스스로 변신하고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의 입구에는 책을 한 아름 안고 있는 서점인 조각이 서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생을 보내는 서점인의 선한 표정을 닮았다. 보수동 책방골목을 갈 때면 나는 책 안고 서 있는 서점인과 인사를 주고받는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책 읽는 사람들의 고향이다.


김언호한길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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