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 2035

맞고 살지 말자 … 말단 사원들의 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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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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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광균 JTBC 경제산업부 기자

열다섯 살이던 어느 날, 옆 반 녀석의 발바닥이 내 배에 묵직하게 꽂혔다. 무방비 상태였다. 맞은 이유도 몰랐다. 그대로 쓰러져 발바닥 주인의 얼굴만 쳐다봤다. 그 녀석이 입을 열었다. “너, 내가 만든 CD꽂이 왜 밟았냐?” 그렇게 내 인생 처음으로 폭행을 당했다.

 벌써 15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맞는 것이 무섭다. 친구들이 ‘우쒸’하며 손만 올려도, 선배들이 애정을 담아 뒤통수를 툭 쳐도 내 몸은 순간 찌릿하다. 조금 과장하면 그렇게 무방비로 폭력의 흔적이 스쳐 갈 때마다 내 배를 힘껏 차던 그 발길질이 떠오른다. 맞아봤기 때문이다. 그때의 아픔은 잊을 수 없다.

 기자가 됐으니 맞고 다니지는 않겠다고? 천만에, 방송기자들은 핫한 인물을 취재할 때나 시위 현장에 갈 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지난여름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 때였다. 뉴스의 인물을 촬영하러 공항에 갔다가 하필 당사자가 내 앞으로 오는 것 아닌가. 그를 둘러싼 경호원들이 근육질의 팔로 나를 확 밀치자 내 몸은 기겁했다.

 병신년 새해부터 때리고 맞는 기사가 쏟아진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후배를 폭행했고, 대학교수는 종강날 제자를 때렸다. 이를 비난하는 손가락질 댓글이 이어진다. ‘운동선수라 주먹질뿐인가?’ ‘제자 부려 먹기도 모자라서 팬다고?’….

 과연 폭력은 운동선수나 ‘갑질’ 교수의 전유물일까? 지난해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1000명에게 물었더니 15%가 신체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그중 절반 이상이 손바닥이나 주먹으로 맞아본 것으로 나타났다. 가해자는 상사 75%, 경영자·임원이 23%. 직장에서도 폭력은 남 일이 아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베테랑’에는 재벌 2세가 등장한다. 그는 밀린 월급을 받으러 온 하청업체 직원과 하청업체 사장에게 권투 글러브를 끼고 싸워 이기는 사람에게 돈을 주겠다고 제안, 아니 강제한다. 관객들이 그 장면에 분노하는 것은, 약간의 허구가 뒤섞였지만 우리 일상의 폭력을 ‘리얼하게’ 그렸기 때문이 아닐까.

 군대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말은 고참의 “인원 점검 마치면 자리에 남아 있어”였다.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 역시 “옥상으로 올라와!”라는 직장 상사의 말이 제일 겁난다고 했다. 신체적 폭력은 많이 사라졌다 해도 우리 주변에 심각한 언어폭력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따위로 일할래?”부터 “내가 네 나이 때는…”까지 모두가 우리를 주눅 들게 한다.

 옛말에 ‘주인보다 머슴의 매질이 더 모질다’고 했다. 올 한 해 우리 말단 사원들은 더욱 열심히 일할 생각이다. 그러니 이 땅의 모든 직장 상사분들, 주먹을 내뻗기 전에 한 번 더 굽어살펴 주옵소서!

손광균 JTBC 경제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