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목사시인 고진하의 '첫 불'

중앙일보

입력

새로운 해의 시작이다.
늘 그렇듯 시작은 남다르기 마련이다.

매주 써왔던 뒷담화,
새해 첫 시작을 앞두고 여느 때와 달리 고민이 따랐다.
인물 선정과 메시지 선택의 갈등,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이럴 땐 외장하드를 뒤져 사진을 찾아보는 게 상책이다.
사진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답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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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고진하목사의 사진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 사진이다.

새로운 시작, 그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그가 들려줬던 ‘첫 불’의 의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게 2014년 6월 18일이다.
종교담당인 백성호기자가 고진하목사를 인터뷰하러 원주로 가자고 했다.
낯선 이름이었다.
원주로 가면서 백기자에게 그가 어떤 인물인지 물었다.

“시골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목사이자 시인이기도 합니다. 딱히 교회를 두고 목회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구요. 생활 속에서 목회와 수도를 하며 시를 쓰는 ‘영성가’입니다.”

그를 두고 ‘영성가’라고 한 백기자의 답,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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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시내에서 그를 만났다.
푸른 물들인 개량 한복에 바랑을 멘 모습, 차림새로 본다면 목사로 짐작하기 어려웠다.

집이 꽤 먼 곳에 있으니 원주 시내에서 그냥 인터뷰를 하자고 그가 제안을 했다.
난 집으로 가자고 우겼다.
그의 아내가 출타중이라 집 열쇠가 없다고 했다.
생활 속에서 목회를 한다고 했으니 당연히 그의 삶의 터전을 눈으로 봐야했다.
꼭 가야한다고 우겼다.

마지못해 그가 가자고 했다.
차로 이십여 분 거리였다.
대문은 그의 말대로 잠겨 있었다.
그가 대문을 지나 옆 골목으로 들어서더니 야트막한 담장 앞에 섰다.

등에 진 바랑을 벗어 백기자에게 건넸다.
누가 봐도 담장을 넘을 모양새였다.
얼른 카메라를 준비했다.

담장을 넘는 순간 카메라를 눌렀다.
카메라 소리에 놀란 그가 깜짝 놀라 나를 쳐다봤다.
딱 도둑질하다가 걸린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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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넘는 목사님’, 어쩌면 이 모습이 그의 삶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목사이면서 타 종교와 동양철학을 공부한다고 했다.
이웃 종교와 철학을 알아야 서로 간의 반목이 없어진다고 했다.
게다가 시가 영성 안에 거하고 영성이 시에 거하는 게 그의 삶이라 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세상이 정해놓은 울타리를 넘나드는 모습이 그의 메시지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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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차를 준비하는 동안 집을 둘러봤다.
담벼락에 나무로 만든 현판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귀한 것은 흔 합니다’라 적혀있다.
담벼락 밑과 장독대 텃밭에 핀 풀과 꽃, 햇빛과 바람, 흔하디 흔한 것들의 귀함을 말하려 함이다.

집안 거실 벽엔 나무를 덧대어 만든 십자가가 걸려있었다.
이 또한 ‘흔한 것의 귀함’일 것이다.
담장 넘어 집으로 온 소득을 찾은 셈이었다.

그 후, 2014년 12월 26일 그를 다시 만났다.
다가올 새해, 그가 중앙일보에 쓸 편지형식의 기고문(2015년 1월 5일 중앙일보 22면 참조)에 함께 게재할 사진을 찍어야 했다.

그를 만난 장소가 또 원주 시내였다.
그에게 기고문에 쓸 내용이 뭔지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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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불’의 의미에 대해 쓸까 생각중이야. 지난 가을에 아궁이를 직접 만들었어.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아궁이속으로 밀어 넣는 그 ‘첫 불’이 뭉클하더라구. 그런데 말야, 매일 불을 붙이며 사실 모든 불이 ‘첫 불’이지하는 생각이 딱 드는 거야. 그렇다면 저 구들방에 혼자 지지든 아내랑 같이 지지든, 매일 밤이 첫날밤인 게지. 이를테면 매일이 태초의 첫날인 셈이라는 얘기를 쓸까해.”

그의 ‘첫 불’ 이야기를 듣고 또 집으로 가자고 우겼다.

“꼭 가야하는 거야?”라며 그가 반문했다.
“꼭 가야합니다. ‘첫 불’ 이야기를 안 하셨으면 몰라도….”
그가 스스로 아궁이에 불 넣는 이야기를 한 터니 안 갈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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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다시 그의 집으로 갔다.
그래도 이번엔 담장을 넘지 않았다.
대문으로 들어갔다.

대문 우체통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날 마다 좋은 날'.

권혁재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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