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이란 저유가 고전 … 오바마 외교는 어부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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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대외 정책에 저유가가 숨은 공신 역할을 하고 있다. 유가 추락이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원유 수출에 의지해 경제를 굴려 왔던 러시아와 베네수엘라가 직격탄을 맞았고, 경제 제재가 풀리는 대로 막대한 오일 달러를 기대했던 이란도 저유가라는 복병을 맞았다. 워싱턴포스트(WP)는 “저유가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압박하고,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을 약화시키며, 이란의 원유 수출 기대치를 줄인다는 점에서 오바마 정부의 대외 정책과 맞아 떨어진다”고 분석했다. 국내적으로도 저유가로 서민층의 가처분 소득을 늘려 경제 회복에 도움이 되는 데다 고유가보다는 저유가가 유럽·일본·한국 등 미국 동맹국의 경기 회복에도 긍정적이라고 WP는 평가했다.

푸틴, 루블화 가치 폭락 쓴맛
베네수엘라 총선서 좌파 몰락
미국·동맹국은 경기 회복 만끽

 지난해 우크라이나 사태를 놓고 오바마 대통령과 충돌했던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러시아 경제는 위기의 고점을 지나고 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의 높은 국내 인기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경제의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30일(현지시간) 러시아 루블화 가치는 또 하락해 연중 최저치를 기록하며 한해를 마감했다. 1달러를 사려면 73.2루블을 줘야 한다. 지난해 초 1달러에 30루블 대였던 것과 비교하면 루블화 가치는 수직 하락했다. 전체 수출의 60% 이상을 석유와 천연가스에 의존했던 러시아로선 저유가가 치명타였다.

 중남미의 반미 선봉장인 베네수엘라의 좌파 정권은 저유가로 집권 위기를 맞았다. 집권당인 통합사회주의당은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16년 만에 참패하며 의회 권력을 중도·보수 야권 연합인 민주연합회의에 넘겼다. 베네수엘라는 그간 원유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로 무상 임대주택 보급에 나서는 등 생산보다는 분배에 치중해 왔다. 한때 무역흑자가 400억 달러를 기록했지만 저유가로 돈줄이 마르면서 외환 고갈로 이어졌다. 국제 금융권에선 베네수엘라가 올해 돌아오는 외채 상환액 160억 달러을 갚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전망도 하고 있다.

 경제 제재가 풀리면 원유를 국제 시장에 대거 수출할 것으로 기대했던 이란도 저유가를 감안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당초 이란은 올해 중반께가 되면 하루 50만 배럴 가량을 추가로 수출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WP는 “저유가로 이란 정부는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며 “저유가 때문에 국제 석유 회사들을 이란 유전 개발에 뛰어들도록 설득하기도 쉽지 않다”고 전망했다. 미국 국무부의 에이머스 호크스타인 국제 에너지 특별 대표는 “이란이 제재로 국제 시장에서 물러나야 했던 2012년 유가는 배럴당 100달러 이상이었지만 지금은 배럴당 36달러”라고 WP에 밝혔다. 또 이란의 원유 수출은 유럽 시장을 놓고 러시아와의 경쟁을 촉발하는 효과도 있다. WP는 “이란산 원유는 유럽을 향할 게 분명해 러시아의 우랄 원유와 충돌한다”는 전문가 분석을 인용했다.

 하지만 저유가 때문에 미국 경제 역시 그림자가 지는 분야도 있다. 저유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원유 업체들에 돈을 빌려준 미국 은행들의 건전성이 악화되기 때문이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원유 기업 대출 등으로 위험에 노출된 미국 은행들은 연방준비제도의 재무건전성 평가를 통과하기 더욱 어려워질 전망”이라고 전했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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