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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소설가 김하기 새누리당으로 출마

중앙일보

입력

1996년 자진월북하는 등 그동안 사상적으로 진보로 분류돼 온 소설가 김하기(57·본명 김영)씨의 ‘사상 전향’이 페이스북에서 파장을 부르고 있다. 그가 내년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부산 동래에서 출마하기로 한 사실이 페이스북을 통해 알려지면서다. 그는 인천의 지역지인 기호일보 25일자에 실은 '존경하는 평론가 김명인에게'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자신이 새누리당 후보로 최근 예비등록하게 된 그간의 경위를 밝혔다. 기호일보가 이 칼럼을 회사 계정 페이스북에 올렸고 댓글이 수 십개 달렸다. 댓글은 대부분 김씨의 '해명'에 부정적인 내용이다.

김씨는 칼럼에서 우선 자신의 과거 '진보 행적'에 대해 소상히 밝혔다.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 때 부산에서 가두 투쟁에 나섰다가 붙잡힌 후 강제 징집돼 군 생활하다 부림 사건이 터지자 총을 들고 탈영해 자결하려 했던 일, 96년 취중 월북했다 돌아와 구속되자 노무현·문재인 등이 자신을 변호를 맡았던 일 등을 회고했다. 하지만 북한에서 목격한 경직된 사회 체제에 환멸을 느껴 역시 운동권이었다가 사상전향한 김문수 전 경기도 지사 등을 사숙한 결과 좌·우를 아우르는 통합된 시각을 갖게 됐고 그래서 지금까지 김문수·하태경 등과 북한의 자유와 인권신장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밝혔다. 또 자신이 큰 강을 건넌 뒤 사상적으로 변하건 맞지만 소설을 배반한 적은 없으며 소설은 사상이 아니라 사람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그동안 각종 신문 칼럼 등을 통해 북한 체제의 문제점을 여러 차례 지적해 왔다. 하지만 진보 진영에서 좀처럼 다루지 않는 북한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과 보수 여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과거 이념적 지향을 같이 했던 진보 진영의 문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듯하다. 이재무 시인은 "변명이 구차하다. 북한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은 가보지 않아도 다 아는 일이다. 바닷물을 꼭 마셔봐야 짠 줄 아는가? 북한의 자유와 권리 신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부지기수다. 남한 사회를 우월하게 만드는 일도 그 하나다. 출세하여 편하고 싶었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게 그나마 덜 추하다"라는 댓글을 남겼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장편 서사시 『한라산』을 펴낸 이산하 시인은 "지금의 생각과 행보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부산에서 선배 김하기 소설가와 만나 술잔을 나누며 많은 비전향 장기수 선생들 얘기를 나누던 시절이 그립다. 그는 곧 출간될 자신의 장편소설 '독도'의 섬만큼이나 외로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위 '강철서신의 주사파 대부' 김영환의 전향과 유사한 이 글은 그의 극단적인 우회전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궁색하고 빈약해 보인다. 함께 항일무투와 빨치산의 숨결을 얘기하던 하기 형마저... 착잡하고 쓰라리다..."라는 글을 남겼다.

김씨는 81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교도소 안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을 만났다. 88년 가석방 출소한 뒤 소설가가 돼 그들의 사연을 담은 소설집 『완전한 만남』을 펴내 반향을 불렀다. 92년 창비사가 운영하는 신동엽창작기금을 받기도 했다.

다음은 기호일보에 실린 김씨 칼럼 전문.

<존경하는 평론가 김명인에게>
김명인 학형, 이승철 시인, 벗 김용락, 크리스마스다. 주님의 탄생을 축하한다. 그런데 김하기가 왜 새누리당 국회의원 예비후보로 등록했는지 변명의 글을 쓰려니 가슴 아프다. "김하기는 ‘완전한 만남’에서 ‘완전한 변신’으로 갔는가? 누가 나에게 답을 달라"고 했던 김명인 평론가, 속으로는 ‘완전한 변절’로 쓰고 싶었을 텐데 어쨌든 고맙다. 이승철 시인도 「완전한 만남」의 작가 김하기의 정치적 소신을 밝히라고 말했는데 당연한 요구다.

 난 1980년 5월 광주 사람들이 죽어 갈 때 광주 사람 죽이지 말라고 부산 남포동에서 유인물을 뿌려 처음 잡혀가 40일 동안 보안대 지하실에서 온몸이 가짓빛이 되도록 죽을 정도의 고문을 당했다.

부림사건이 터지자 다시는 잡히지 않으려고 총을 들고 탈영해 사흘간 산속을 헤매다 총구멍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발가락에 걸고 자살하려고 했다.

이후에도 두만강 삼합에서 300여m의 두만강을 건너다 큰물에 휩쓸려 익사 직전에 북으로 떠내려가 천운으로 살아난 사람이다.

 평론가 김명인 교수를 만난 것은 전주교도소다. 나는 부림사건으로 들어갔고 김명인은 무림사건으로 들어왔다. 김명인과는 58개띠 같은 나이지만 사상적으로는 김명인이 형이다.
우리는 전주교도소 비전향장기수를 수용하는 특별사동에서 만났다. 일본의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는 ‘경험은 바보의 스승’이라고 말했던가.

나는 매우 어리석기 때문에 이론보다는 경험을 통해 소설을 썼고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가치를 배워 왔다.

장기수들과의 오랜 옥중 경험에서 「완전한 만남」을 썼다. 김명인도 썼듯이 살인적인 고문과 협박 아래서 견결히 사상을 지켜내는 그들에게 강렬한 숭고함을 느꼈다. 그 소설의 여파로 인해 비전향장기수들이 우리 사회에 알려지고 석방돼 고향으로 북송되는 일도 있었다.

 출소 후 난 분단 이후 최초로 625리 철책선을 따라 걸으며 「마침내 철책 끝에 서다」라는 책을 쓰면서 꼭 북한에 한 번 가 보고 싶은 마음속 간절한 염원이 있었다. 1996년 7월 여름소설학교를 중국 옌볜(延邊)에서 열 때였다.

두만강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헤엄을 쳐서 북으로 가서 한 달 만에 돌아와 구속됐다. 나의 변호사는 노무현, 문재인이었다. 난 나를 열정적으로 변호해 준 그들에게 지금도 고마움을 느끼고 인간적으로 좋아한다.

 하지만 두만강을 건너서 내가 두 눈으로 본 북한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경제도, 인권도, 자유도 없는 오직 일인세습독재공화국, 동토의 나라였다. 김일성·김정일 세습 우상화로 종교화된 사이비집단이었다. 이런 권력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작가들이 가장 싫어 하는 것이다.

내가 듣기로 남한에서 월북한 사람 중 교화시키는 데 가장 오랜 기간을 잡는 이들이 소위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 작가라는 직업군이다. 근본적으로 작가는 이데올로기보다는 자유를 좋아하고 그만큼 획일적이고 우상화된 것을 싫어 하기 때문이다.

 두만강 도강 이후 북한에 환멸을 느껴 사상적으로 난 뉴라이트 계열인 김문수 전 지사, 김진홍 목사를 사숙했다. 몇 년 전부터 매주 북한인권법 통과를 위해 여의도에서 집회를 했고, 김문수·하태경·김태훈과 함께 북한의 자유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때 그 사건은 나에게 좌우를 아우를 수 있는 객관적이고 통합된 시각을 만들어 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자성어는 주역(周易)에 나오는 이섭대천(利涉大川)이다. 큰 강을 건너 천하를 이롭게 하는 괘다. 난 두만강을 건넌 후 대한민국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 때문에 이어령 장관 밑에서 전문기획위원도 했고, 김문수 경기지사의 특보도 했다. 그러나 정치인 이전에 난 글을 쓰는 소설가, 작가임을 하루도 포기한 적이 없다. 글은 나의 운명이고 생명이다.

큰 강을 건넌 뒤 사상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은 인정하겠으나 소설을 배반한 적은 없다. 소설은 사상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담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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