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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구단으로부터 외면받던 김현수…연습생 출신 최초 MLB 진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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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31일 인천의 한 PC방. 까까머리 고교생들이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소집된 야구 청소년 대표팀 선수들이었다. 그들은 2006년 프로야구 2차 신인지명회의 문자중계를 PC를 통해 보고 있었다. 자신들의 야구인생을 결정하는 순간을 확인하려고 그들은 '새로고침'을 열심히 눌렀다. 나승현(롯데)·류현진(한화)·차우찬(삼성)·강정호(현대)….

한기주(KIA) 등 1차 지명을 이미 받은 선수 3명과 2학년 김광현(안산공고)을 제외한 대표팀 14명이 2차 지명 대상자였다. 6라운드 지명이 끝나자 한 선수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14명 가운데 끝까지 호명되지 않은 단 한 명, 신일고 3학년 김현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김현수는 메이저리그(MLB) 입성을 앞두고 있다. 메이저리그 홈페이지는 17일(한국시간)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김현수와 2년 총액 700만 달러(약 83억원)에 계약했다는 소식이 있다. 신체검사를 마치면 계약이 확정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김현수는 한국 프로야구 자유계약선수(FA) 사상 처음으로 MLB에 진출한 야수가 된다. 지난해 강정호(28·피츠버그)와 최근 박병호(29·미네소타)는 포스팅(비공개 입찰)을 통해 MLB로 이적했다.

고교 시절 김현수는 뛰어난 왼손타자였다. 그러나 프로 8개 구단으로부터 선택을 받지 못했다. 주 포지션인 1루수로는 파워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서였다. 발이 빠른 것도, 송구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몇몇 스카우트들은 "김현수가 게으르다"고 수군댔다.

드래프트에서 탈락하자 LG와 두산이 그에게 연습생 신분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했다. 연습생에겐 계약금을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대도 입학을 권유했다. 고심 끝에 그는 두산을 선택했다. 서울에서 자란 데다 두산이 유망주 육성에 적극적이란 점을 고려했다. LG에는 베테랑이 많아 출전 기회가 많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김현수는 2006년 11월 일본 미야자키 교육리그에 참가했다. 패기 있는 선수를 좋아하는 김경문(57) 감독(현 NC 감독)이 그를 지켜보기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김 감독은 "현수가 좌익수로 나와서 공을 쫓다가 펜스에 부딪혔다. 크게 다쳤을 줄 알았는데 툭툭 털고 일어나서 뛰더라. 저런 마음가짐이면 1군에서도 잘할 거라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2006년 2군에서 두각을 드러낸 김현수는 그해 여름 프로선수 최저 연봉인 2000만원에 정식 계약을 하고 1군에 올라왔다. 2007년엔 개막 엔트리에 합류해 3번 타자로 나섰다. 갑자기 중책을 맡은 김현수는 부담감에 시달렸다. 팬들은 만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김현수를 중용하는 김 감독을 비난했다. 김 감독은 김현수를 2군에 잠시 보냈다가 다시 불러들였다. 1군 첫해 성적은 타율 0.273, 5홈런 32타점.

김현수의 기량은 2008년부터 만개했다. 스무 살 나이에 타격왕(0.357)을 차지했고, 베이징올림픽 대표팀에도 합류했다. 그에겐 '타격기계'란 별명이 붙었다. 시즌 초 타율이 4할을 넘겼다가 아래로 떨어지자 일부 팬들은 '사못쓰(4할도 못치는 쓰레기)'라며 친근함을 담은 역설적인 응원을 보냈다.

올해는 홈런 28개를 날리며 장타력까지 자랑했다. 시즌 중 그의 훈련용 글러브에 성조기가 박혀 있는 걸 본 기자가 "MLB에 가려는 것이냐"고 물었다. 김현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고 잡아뗐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에이전트를 선임한 뒤 MLB 진출을 추진하고 있었다. 올해 두산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김현수는 국가대항전 프리미어12에서도 한국 대표팀 우승에 공헌했다. 타율 0.333(33타수 11안타), 타점 13개를 기록한 그는 프리미어12 최우수선수에 선정됐다.

김현수는 어린 시절부터 MLB 경기를 즐겨 봤다. 국내 정상급 타자가 된 이후에도 MLB는 그에게 꿈이었다. FA가 되는 올 시즌을 앞두고 김현수는 레그킥(이동발을 높이 드는 동작)을 버리고 오른 다리의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MLB 스타일 맞춘 것이다. 말은 아끼고 꿈을 키웠다.
김현수가 MLB 진출을 추진하자 볼티모어를 비롯해 오클랜드·샌디에이고 등 MLB 구단들이 영입전에 나섰다. 일본 최고의 부자구단 소프트뱅크도 큰 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10년 전 국내 구단들로부터 모두 외면 받았던 김현수가 만들어낸 기적이다. 지난해까지 한국인 메이저리거는 15명이나 됐지만 연습생 출신은 그가 최초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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