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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반도 워치

한반도 평화를 위한 일본의 중층적 역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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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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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희
서울대 교수
서울대 일본연구소장

한국은 냉전이 종식된 후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왔다. 북한의 핵보유가 불투명하던 시절, 한국은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통해 북한의 내부적 변화를 유도하고 대화와 협상을 통해 북핵 포기를 종용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 핵개발은 멈추지 않았다. 북한의 핵개발이 협상 도구 이상의 생존수단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은 핵실험 강행이었다. 북한의 핵보유가 현실로 다가온 이후에는 외부로부터 압박·고립하는 ‘강경정책’을 통해 북한 바꾸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외부로부터의 압력과 고립으로 붕괴된 정권이 없다는 경험적 사실을 뒤집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 ‘통일을 앞당기는 것’만이 북한을 바꾸는 해답이라는 접근법을 시도하고 있다. 통일은 분명 북한문제 해결의 열쇠이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통일이 다가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 통일론이 북한의 체제 붕괴를 전제로 한 것이라면 북한이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바란다면 북한 붕괴론의 신화를 믿기 보다는 북한의 변화를 유도해 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일본은 적극 활용해야 할 인접국
소극·적극적 평화 중간 단계에서
한·일, 북한 비핵화에 공조하며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 요구해야

 일본은 한반도 평화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적어도 일본은 한국이 주도하는 한반도 통일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자유민주주의체제와 시장경제가 작동하는 국가의 외연이 확장되는 것을 일본이 반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이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한 다층적 협력관계를 발전시키자 일본은 북한에 국교 정상화 교섭 카드를 내밀었다. 일본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한반도의 현상 변경 과정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한·미·중 중심으로 남북관계의 변곡점이 만들어진다면 일본의 역할은 최소화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예전에도 자기들만 빠진 한반도 사태의 전개를 ‘악몽’처럼 여겼다. 제네바합의를 이끌어낸 1994년 ‘북·미 협의’, 일본이 참여하지 않은 ‘4자회담’, 남북한 비밀접촉에 의한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일본은 불안감을 감추지 않았다. 우리와 긴밀히 소통하지 않은 채 진행된 2002년 일·북 정상회담을 바라봤던 우리와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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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내각은 납치자에게 한정되지 않는 ‘일본인 재조사’ 카드를 꺼내들고 한반도 문제에 다시 관여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납치 문제는 일본 내에서 지나치게 정치화돼 여론의 볼모가 돼버렸다. 요코타 메구미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납치문제의 해결이 없다고 스스로 손을 묶어버린 우파 진영의 패착이 진전을 막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나 다른 관련국을 놀라게 할 일·북 관계 진전 가능성은 낮다. 설령 납치문제의 진전이 있다고 해도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양국 관계 정상화는 답보상태일 것이다. 물론 미·북 관계가 급속히 진전되거나 남북한 간 관계 개선이 급물살을 탈 경우 일·북 관계도 동시진행형으로 전개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일본이 한반도 평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멈추지 않을 경우 한국은 북한의 군사 도발 대비에 빈틈이 없어야 한다. 한국의 자주국방력이 강화되고 한·미 동맹이 굳건해지면서 ‘일본 불필요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지만 일본에 있는 7개 유엔사령부 기지를 활용하지 않으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없다. 일본의 자위대에 의한 후방 지원도 한반도 안보에는 필수불가결하다. 미국을 매개로 한국과 일본의 안보역량이 연계돼 있을 때 북한은 오판을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한반도의 ‘소극적 평화’를 위한 중요한 자산이다.

 일본은 ‘적극적인 평화’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일·북 사이에는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총리와 김정일 정상회담 당시 국교 정상화를 전제로 합의한 ‘북·일 평양선언’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양국 간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현안을 해결해 실질적인 정치·경제·문화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양국의 기본 이익과 일치한다고 적혀 있다. 북한에서 의미 있는 정책 변화가 일어나고 일·북 관계가 개선된다면 경제협력자금의 형태로 100억 달러 정도에 이르는 자금이 10년 정도에 걸쳐 투입될 공산이 크다. 기술력을 동반한 일본의 자금은 한국과 호환성이 있는 인프라 건설에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 북한에 실질적인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의 중간 단계에서 한·일은 6자회담의 당사국으로서 북한의 비핵화에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6자회담은 공전되고 있지만 2005년 9·19 합의를 통해 비핵화의 기본 원칙과 한반도 평화 정착의 로드맵을 담고 있다. 비핵 국가가 전략적 선택인 한국과 일본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공조하고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위해 보조를 맞추면 국제사회에서의 설득력이 높아진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충분히 활용하고 협력해야 할 인접국이다.

박철희 서울대 교수 서울대 일본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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