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강사들의 차분한 대응이 분당 화재 대형참사 막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난 11일 오후 8시18분쯤 경기도 분당구 수내동 S빌딩 1층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서 불이 났다. 이 불은 3분여 만에 외벽을 타고 12층 꼭대기까지 번졌다가 1시간20여 분만에 진화됐다.

당시 2층에서는 250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학원 수업을 듣고 있었다. 불이 나자 학생들은 비상계단을 통해 지하층으로 대피했고, 이후 차량통행로를 이용해 지상으로 모두 무사히 빠져나왔다. 학생들은 단순 연기 흡입 정도의 피해만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귀가했다. 5명 정도만 증상이 조금 심해 입원 치료 중이다. 사망자나 중상자는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는 지난 1월 5명이 사망하고 125명이 부상한 경기도 의정부시 D아파트 화재 때와는 전혀 다른 결과다. 분당 S빌딩도 의정부 D아파트처럼 1층이 주차장인 필로티로 된 구조다. 또 외벽도 스티로폼에 시멘트를 입힌 ‘드라이버트’ 공법을 사용했다. 불이 1층 주차장에서 발생해 불과 몇 분도 안돼 건물 꼭대기까지 번진 것도 비슷했다.

그런데도 인명 피해가 단순 연기 흡입 정도에 그쳤던 것은 교사들의 차분한 대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하로 대피한 학생들이 연기를 흡입해 힘들어할 때 가장 먼저 탈출구를 찾아 나선 네 자녀의 아빠 전성우(47) 교사, 여동생을 찾아야 한다며 울부짖는 여학생과 함께 끝까지 교실에 남은 김성주(40) 교사, 가장 먼저 화재를 인지하고 복도로 나가 “불이야”를 외친 뒤 17개 교실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뒤에야 대피한 공상태(38) 교사 등…. 소화기를 들고온 교사부터 휴지에 물을 묻혀 아이들에게 건넨 교사까지 당시 2층 학원에 있던 17명의 교사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보다 학생들을 먼저 대피시켰다.

가장 먼저 불이 난 사실을 알게 된 건 공상태 교사였다. 공 교사는 수업 도중 창문 밖에서 화마가 치솟는 걸 목격했다. 공 교사는 곧바로 복도로 뛰쳐나가 “불이야. 모두 대피하십시오”라고 외쳤다.

수업을 받던 학생들이 일순간 복도로 뛰쳐나왔다. 우왕좌왕하던 아이들은 교사들의 지시에 따라 한 줄로 서서 비상계단으로 이동했다. 복도문과 계단문 2개로 된 이중방화문 구조 탓에 비상계단의 가시거리는 1~2m에 불과했지만 교사들은 최대한 학생들을 안심시키며 마지막 한 명까지 챙겼다. 17개의 교실을 모두 둘러본 공 교사는 마지막으로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때 2층 로비에 있던 한 여학생이 “여동생이 빠져나오지 않았다”며 울고 있는 걸 발견했다. 공 교사와 함께 교실을 점검하던 김성주 교사 등 교사 3명은 여학생을 안심시킨 뒤 교실을 다시 뒤졌다. 여동생이 없는 걸 확인한 김 교사 등은 여학생과 함께 1호 강의실로 향했다. 유일하게 창문을 열 수 있는 데다 여차하면 뛰어내리기 위해서였다. 이 때 소방관이 교실로 들어왔고, 이들은 고가 사다리를 이용해 안전하게 1층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지하 1층 비상계단에 대기 중이던 전상우 교사는 연기가 계속 유입되면서 자칫 아이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전 교사는 지하 1층 주차장과 연결된 출입문을 열기 전 학생들에게 뒤로 물러서 있으라고 했다. 문을 연 순간 화마가 밀려올 수 있어서였다. 다행히 주변에 화마는 없었다. 피난 통로를 확보한 전 교사는 아이들을 한 명씩 밖으로 이동시켰다.

전 교사는 “문을 열 때 솔직히 두렵기도 했지만 당시엔 아이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며 “아이들도 당황하지 않고 2명씩 짝을 지어 나왔다. 학생들이 정말 잘 따라줘서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당시 현장에 있다 구조된 낙생고 2학년 김모군의 어머니는 이후 공 교사 앞으로 “샘(선생님)들의 신속한 행동과 아이들의 질서정연한 행동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온 것 같다”며 “아이들을 위해 애써주신 샘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화재 사고를 수사 중인 경기 분당경찰서는 13일 학원 강사들을 상대로 1차 조사를 벌인 결과 화재 당시 S빌딩에 설치된 2000여 개의 화재 감지기는 물론 스프링클러도 작동하지 않았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S빌딩은 지난 3월 자체 소방점검을 받아 스프링클러 노후화 등 10건을 지적받고 보완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 관계자는 “강사들 대부분 경보음은 물론 대피하는 동안 스프링클러도 작동하지 않았다고 진술한 만큼 이 부분도 조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실화나 방화가 아닌 전기적 요인으로 전선이 끊어지면서 생긴 불꽃이 천장으로 옮겨 붙으면서 화재가 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경기소방재난본부 등과 합동감식을 벌였을 때도 1층 천장에서 전선이 끊어진 흔적이 발견됐다. 경찰은 정확한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국과수에 정밀 감정을 의뢰했다.

경찰 관계자는 “건물주와 관리사무소 관계자를 비롯해 시공사 관계자와 전기업자 등도 소환해 조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성남=임명수·최모란 기자 lim.myoungs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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